Catergories
Recent Articles
Recent Comments
Recent Trackbacks
Calendar
Archive
Link
Search| 바그너의 경우 (Der Fall Wagner.) - Ein Musikanten-Problem.
Von Friedrich Nietzsche.
서문 나의 가장 큰 체험은 병의 치유였다. 바그너는 내가 가졌던 병증들 중의 하나에 불과할 뿐이었다. 내가 바그너라는 병에 감사하고 싶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이 글에서 바그너가 해롭다고 주장하면서도 나는 그가 누구에게 필요 불가결한지에 대해서도 주장하고 한다.―그가 철학자에게 필요불가결하다는 것을. (중략) 현대 영혼의 미궁의 내막에 대해 바그너보다 더 정통한 인도자를, 바그너보다 더 유창한 영혼의 고지자를 어디서 발견하겠는가? 현대성은 바그너를 통해서 자신 안에 있는 가장 내밀한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 현대성은 자신의 선한 면도 숨기지 않고, 악한 면도 숨기지 않는다. 현대성은 자신을 부끄러워하는 것을 잊어버렸다. 그리고 역으로 : 바그너에게서 선과 악의 결과가 어떠할지가 명백히 알려지면, 현대의 가치에 대한 계산이 거의 끝나버린 셈이 된다.―오늘날 한 음악가가 “나는 바그너를 증오하지만 여타의 음악은 더 이상 참아낼 수 없다”라고 말한다면, 나는 이 말을 완전히 이해한다. 그러나 나는 다음처럼 말하는 어떤 철학자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 “바그너는 현대성을 요약하고 있다. 별다른 도리가 없다. 일단은 바그너주의자가 되어야한 한다……”
-> 모너니티의 선구자이자 이 시대의 아들, 즉 한 사람의 데카당1)이다.
바그너의 경우 (1888년 5월 토리노에서의 편지) - 웃으면서 진지한 사항을 말한다.
바그너의 오케스트라에 대해서 바그너의 오케스트라 음색은 난폭하고 인위적이며 그러면서도 ‘순수’해서. 현대 영혼의 세 감각에 대고 한꺼번에 말을 해댑니다.― 이러한 바그너의 오케스트라 음색은 내게 얼마나 해를 끼치는지요! 나는 그것을 북아프리카에서 지중해 연안으로 불어대는 열풍인 시로코Scirocco라고 부릅니다.
사랑에 대해서 그들은 사랑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바그너 역시 사랑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사랑을 이기적이지 않다고 믿었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다른 사람의 이익을 바라고 또 곧잘 자신의 이익에는 배치되는 것을 바라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그 대신에 그들은 다른 사람을 소유하기를 원합니다……신마저도 예외는 아닙니다. 신은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2) 라는 식으로 생각하는 것과는 거리가 멉니다─사람들이 그에게 사랑으로 응답하지 않으면 그는 무시무시해집니다. 사랑은─이 격언으로 신과 인간 사이에서 옳은 판단을 내릴 수 있습니다.─그 무엇보다도 가장 이기적인 감정이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상처받게 되면 가장 관대하지 못하다.(B. Constant.)
오페라에 대해서 그의 오페라는 구원의 오페라이며, 언제든 누군가가 그의 곁에서 구원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 때로는 어느 젊은 청년이, 때로는 어느 젊은 처자가 말입니다─이것이 바그너의 문제인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의 주도동기Leeitmotiv를 얼마나 다양하게 변화시키는지를! 바그너가 아니라면 누가 우리에게 가르쳐주겠습니까? 편애하는 순진한 처녀가 자기가 각별히 관심을 갖는 죄인을 구원한다는 것을(<탄호이저3)>의 경우), 또는 영원한 유대인도 결혼하면 정작하게 되어 구원받게 된다는 것을(<방랑하는 네델란드 사람>의 경우). 또는 낡고 찌든 여인의 방은 순결한 젊은이에게 구원받기를 선호한다는 것을(<쿤드리>의 경우). 또는 아름다운 소녀는 바그너주의자 기사에게 구원받는 것을 가장 좋아한다는 것을(<마이스터징어>의 경우) 또는 결혼한 여인 역시 기사에 의한 구원을 기꺼워한다는 것을(<이졸데>의 경우). 또는 ‘늙은 신’이 모든 면에서 도덕적인 타협을 하고 난 다음에 결국에는 자유정신과 비도덕주의자들에 의해 구원받는다는 것을(<반지>의 경우). (중략) 바그너의 발레는 사람들을 절망에 이르게 할 수 있다는 점을─그리고 덕에 이르게 할 수 있다는 점을!(또 한번 <탄호이저의 경우). 그것이 제시간에 잠자리에 들지 않아서 생기는 가장 나쁜 결과들 중 하나일 수 있다는 점을(다시 한번 <로엔그린>의 경우). 정말 누구와 결혼했는지를 결코 정확히 알아서는 안 된다는 점을(세 번째로 <로엔그린>의 경우)─<트리스탄과 이졸데>는 완벽한 남편을 찬양합니다. 그 남편은 어떤 경우라도 단 하나의 물음을 가질 뿐입니다 : “그런데 왜 당신은 미리 내게 말하지 않았는가? 그것이 제일 간단한 것인데!” 대답 : “나는 그것을 당신에게 말할 수 없어요 ; 그리고 당신이 물어보았을 그것을, 당신은 절대 경험할 수 없을 거에요.”
예술에 대해서 바그너는 노이로제 환자입니다.4) 여기서 예술과 예술가라는 번데기가 되어버린, 변질이라는 프로테우스적 속성보다 오늘날 더 잘 알려져 있는 것은 없으며, 더 잘되어 있는 연구도 없습니다. 우리의 의사들과 생리학자들은 자신들에게 가장 흥미로운 경우, 최소한 매우 완전한 질환의 경우를 바그너에게서 보고 있습니다. 신경 기관의 이런 미숙과 과민보다 더 현대적인 것은 없기 때문에, 바그너는 전형적인 현대 예술가이며 현대성의 칼리오스트로A. Cagliostro입니다. 그의 예술 안에는 오늘날 전 세계가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이 가장 유혹적인 방식으로 혼합되어 있습니다─지쳐있는 자들을 자극하는 잔인과 기교와 순진무구(바보스러움)라는 세 가지 중요한 자극제가 말이지요.
바그너 문학의 핵심에 대해서 교활의 학교입니다. 바그너가 연주해내는 처리 방식의 체계는 수백 가지 다른 경우들에도 적용됩니다─귀가 있으면 한번 들어보십시오. 그 세 가지 가장 귀중한 처리 방식을 명확하게 표현해준다면, 내가 사람들에게 감사를 요구해도 마땅하지 않을까 합니다.
바그너가 할 수 없는 모든 것은 비난받아 마땅하다. 바그너는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을 것이다 : 그러나 그가 원하지 않는다─원칙의 엄격성 때문에 바그너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은 어느 누구도 흉내 내지 않을 것이고, 어느 누구도 먼저 해내지 않았으며, 어느 누구도 흉내 내서는 안된다…… 바그너는 신적이다……
이 세 명제들은 바그너 문학의 핵심입니다 : 나머지는─그냥 ‘문학’이지요. (중략) 달리 말하면, 사람들이 그 음악을 꽤 어려워하지 않고서도 이해한다는 것이 이유가 될까요?─실제로 그는 평생 하나의 명제만 되풀이해왔습니다 : 자기 음악이 단지 음악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고 말이지요! 음악 이상을 의미한다고!……“단지 음악만이 아니다”─어떤 음악가도 이렇게는 말하지 않습니다. 다시 한번 말하자면 바그너는 전체를 창작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니 그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으며, 불완전한 것을 만들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모티브’, 몸동작, 정식, 이중으로 늘리고 백 배로 늘임. 음악가로서 그는 수사학자였습니다─그래서 그는 원칙적으로 ‘그것의 의미는’이라는 것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입니다. “음악은 언제나 수단일 뿐이다” : 이것이 그가 내세웠던 이론이었으며, 무엇보다도 그가 통틀어 실천할 수 있었던 유일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떤 음악가로 이런 식으로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바그너는 자기 음악이 “무한한 것을 의미하므로” 진지하게 받아들이라고, 깊이 있게 받아들이라고 전 세계를 설득시키기 위해 문학을 필요로 했던 거지요 : 그는 평생 ‘이념’의 해설가였습니다.
니체의 요구에 대해서 (상략) 예술에 대한 나의 분노와 우려와 사랑이 이번에 나에게 말하도록 했던 그 세 가지 요구들을 말입니다. 극장은 예술을 지배하는 주인이 되지 않는다는 것. 배우는 진정한 예술가를 현혹하는 자가 되지 않는다는 것. 음악은 기만하는 예술이 되지 않는다는 것. 프리드리히 니체.
추신 바그너 추종자들은 비싼 대가를 치르고 있습니다. 나는 오랫동안 바그너라는 전염균에 방치되어 있던 젊은이들을 관찰했습니다. 그 첫 번째의 비교적 악의 없는 효과는 취향의 <부패>입니다. 바그너는 알코올을 지속적으로 사용하는 것 같은 효과를 냅니다. 무감각하게 만들고, 위에는 점액이 차게 합니다. 특별한 효과는 : 리듬 감각의 퇴화입니다. 내가 그리스식 상투어로 “늪을 움직인다”라고 불렀던 것을 바그너주의자는 끝내 리드미컬하다고 일컬어버렸습니다. 정말 훨씬 더 위험한 것은 개념의 타락입니다. 젊은이는 천치가 되어버립니다─ ‘이상주의자’가 되어버립니다. 그는 학문을 넘어서 있습니다 : 이 점에서 그는 거장의 높이에 있기는 합니다. 그런데 반면 그는 철학자 흉내를 냅니다 : 그는 학문을 넘어서 있습니다 : 이 점에서 그는 거장의 높이에 있기는 합니다. (중략) 아아, 이 늙은 미노타우로스! 그가 우리에게 무엇을 잃어버리게 했던가! 매년 사람들은 가장 아름다운 처녀들과 청년들의 행렬을 그의 미궁 속으로 이끌어갑니다. (후략) 1) 데카당(Decadent)/ (영)Decadent : 19세기말의 일군의 시인들을 일컫는 말로 특히 프랑스의 상징주의 시인과 그와 비슷한 시기의 영국 심미주의 운동의 후세대에 속하는 시인들을 말한다. 이 두 집단은 문학과 예술을 산업사회의 물질만능주의로부터 해방시키고자 했으며, 일부는 도덕에서도 자유분방함을 추구했기 때문에 '데카당'의 의미가 확대되어 '세기말'(世紀末)과 거의 같은 뜻으로 쓰이게 되었다. 데카당이라는 용어는 원래 프랑스의 가브리엘 비케르와 앙리 보클레르가 쓴 풍자시집 〈아도레 플루페트의 퇴폐 Les Deliquescences d'Adore Floupette〉(1885)에 나오는 말인데, '퇴폐적'이라는 뜻의 이 형용사를 폴 베를렌이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아나톨 바쥐가 창간한 평론지 〈데카당 Le Decadent〉은 1886~89년 간행되었고, 폴 베를렌도 그 잡지의 기고자였다. 데카당파는 1867년에 죽은 샤를 보들레르가 그들에게 영감을 주었다고 주장했으며, 아르튀르 랭보, 스테판 말라르메, 트리스탕 코르비에르도 그 일원으로 꼽았다. 이밖에 중요한 인물은 종교적 신비에 관심이 많은 소설가 J. K. 위스망스가 있었는데, 그가 쓴 〈 역로 A rebours〉(1884)라는 소설을 영국의 아서 사이먼스('금발의 천사'로 불림)는 '데카당파의 기도서'라고 불렀다. 영국의 데카당파는 1890년대에 라이머스 클럽회원이거나 〈옐로 북 The Yellow Book〉의 기고자인 아서 사이먼스, 오스카 와일드, 어니스트 다우슨, 라이어넬 존슨 등이다. G.L. 반 로제브루크가 쓴 〈데카당파의 전설 The Legend of the Decadents〉(1927)에는 '데카당'이라는 용어의 해설이 나온다. (출처 : 브리태니커백과사전) 2) Goethe, Wilhelm Meister, Lehrjhre Ⅳ. 9 : Dichtung und Wahrheit Ⅲ. 14 비교 3) 참고자료 1 4) Journal des Goncourt Ⅱ, 279쪽의 “Et l mot 여 docteur de Tours : Le génie est une névrose"와 비교. 니체는 이 시기에 이 책을 읽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