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ergor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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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arch| 그녀의 매혹 2006년 11월 작품 대산문화재단 주관 제5회 대학대산문학상 응모 소설 부문 응모작 less.. 피가 귀에서 흘러내린다. 약간 검붉은, 짙은 색의 피가 귓가를 스쳐 어깨로, 땅바닥으로 조용히 떨어진다. 나는 온몸에 스며드는 핏빛 향기를 맡고 있다. 후회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꽉 쥐어야 했던 손을 이제야 놓을 수 있다. 이미 저질러 버린 일이다. 죽음에 이르기 전까지 내가 오늘 저지른 죄는 씻어지지 않겠지. 그저 진득하게 붙어 있는 피를 닦아내기만 할 뿐이다. 엄지손가락부터 천천히 떼기 시작했다. 가득 들어있던 힘을 빼자 손가락 마디마디가 울부짖으며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갑자기 째깍째깍 소리를 내는, 이제는 없어져 버린 오래된 외할머니 집의 큰 시계가 생각났다. 시계추가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는 모습을 신기하게 지켜보며, 어떻게 시계는 조금도 지루해하지 않고 한없이 똑같이 움직일 수 있는 걸까 라고 생각했다. 천천히, 천천히 시계추의 왕복을 떠올렸다. 무언가 어긋나 보였던 그 움직임, 그리고 째깍 거리는 소리. 작게 느껴졌던 미세한 음의 부조화는 이내 전체 음의 조화를 무너뜨리고는 당당히 모든 음을 압도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나는 어긋나 버렸다. 손가락 사이로 검붉은 피가 흐르고 있다. 갑자기 격한 감정이 복받쳐 올라, 거침없이 강하게 밖으로 터져 나왔다. 나는 울고 있다. 피 묻은 옷핀이 손에서 떨어졌다. 허벅지에서 탄력 있는 소리로 한번 튕기며 땅바닥에 떨어진다. 그러고 나서 피가 고인 웅덩이의 귀퉁이로 빠져버린다. 마치 사람이 늪에 빠져 몸통부터 머리까지 천천히 침식되듯이 그렇게, 그렇게 천천히. “아파, 아파, 아파. 정말 아파.” 남 몰래 죄를 짓는 기분과 남에게 알리며 죄를 짓는 기분 그 둘은 미묘하게 느낌이 다르다. 희열감과 아찔함은 남에게 들키지 않아야만 맛볼 수 있고, 자신의 모든 것을 보여준다는 것에 수치감과 함께 짜릿함을 함께 맛볼 수 있다. 그 어느 쪽을 선택하였다고 하더라도 만약 그 죄가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긴다면, 그 일을 저지르고 난 다음에 느끼는 감정은 미묘함을 벗어나 그 어떤 일을 하더라도 맛볼 수 없는 최고의 희열을 선사해준다. 지금 나의 몸을 감싸고 있는 얇은 피부가 그 희열을 맛보며 고통과 즐거움을 동시에 느끼고 있다. 웃음과 울음이 동시에 흘러나와 어느 쪽을 선택하기 어렵기에 한쪽 얼굴은 웃고 한쪽 얼굴은 우는 비대칭적인 표정을 하고 있겠지, 나는. 내 나이 열아홉. 미치는 건 한순간이며 나는 그 과정에 있다.
나는 양 무릎을 꿇고 땅바닥에 묻은 핏자국을 닦고 있다. 이따금씩 귓불이 아파와 가만히 앉아 통증이 가라앉기만을 기다렸다. 눌어붙은 핏자국을 지우는 게 이렇게나 힘든지 몰랐다. 어깨가 삐걱거리는 느낌, 못쓰게 된 의자가 쉬이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는 것 같이 앞뒤로 흔들린다. 간신히 방 정리를 끝내고 방바닥에 드러누웠다. 차가운 기운이 등짝을 타고 올라와 아련하게 몸을 감염시켜 나갔다. 차갑고 차갑게 온몸을 전염시킨다. 아프다. 허리를 타고 올라오는 이 찌릿함은 싫다.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 시간이라면 어머니밖에 없다. 피가 묻은 수건을 책상 밑에 던져놓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마음을 가다듬었다. 평소와 같이 행동하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를 거다. 심호흡을 한번 하고 방문을 열었다. “다녀오셨어요?” 안방에서 응답하는 소리가 들렸다. 얼굴을 마주보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오늘 밤만 지나고 나면 어떻게든 할 수 있을 것 같으니까, 되도록이면 이대로 쭉 얼굴을 마주치지 않기를 기원했다. ‘제발 아무 일 없기를.’ 어머니의 얼굴을 마주보게 되면 난 울어버릴지도 몰라, 아니 울고 말거다. 밖에서 어머니가 이리저리 부산히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집안에 어질러진 물건을 정리하고 저녁을 준비하시겠지. 어머니가 방으로 오실까봐 잔뜩 긴장했던 마음이 조금이지만 풀려 깊게 숨을 내쉬었다. 나는 방의 불을 끄고 잠이 오길 기다렸다. 차라리 아프다고 말하는 게 편할지 몰라.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신경을 써서 일까, 아니면 피를 많이 흘러서 일까. 어느 쪽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은근하게 느껴지는 이 현기증, 신경 쓰인다. 그 뿐이 아니라 아까부터 계속 아픈 귓불의 고통은 줄어들지 않고 더욱더 심해졌다. 나를 잊지말아달라는 듯, 고통이 익숙해져 참을만하면 좀 더 다른 의미와 색깔로 다시 찾아왔다. 영원히 벗어날 수 없는 굴레처럼. 눈을 뜨고 천정을 쳐다보았다. 저 멀리에 있지만 왠지 손가락을 뻗으면 닿을 것만 같다. 손가락과 천정 사이에 깔린 암흑은 한 장의 종이이며 강하게 끌어당겨 찢어버리면 그렇게 될 거라고 믿는다. 믿고 싶다. 원하는 물건을 사고, 행복한 추억을 만들고, 자유롭게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하고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고 싶을 때 만나는 것까지 무조건 이루어진다고 생각하면 안 되는 걸까. 나는 내가 바라는 일을 하고 있다. 그래서 행복하다. 누가 뭐라고 해도 나는 행복하다. 나중에는 후회할지도 모르지. 하지만 지금은 무조건 이루어질 거라고 믿으니까, 설령 기대를 저버리더라도 그걸로 괜찮다고 생각해. 나는 나약하다. 나는 나약해서, 믿는 것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지. 그래, 믿고 있다면 흔들리지 않고 내가 한 일을, 내가 지우지 못할 죄라고 생각하는 이미 끝나버린 행동을 떳떳하게 내어 보여야 하는 거다. 어머니, 어머니의 얼굴을 떠올리며 저는 이렇게 자신을 벌하고 있습니다. 걱정이 가득 담긴 표정으로 아프지 않느냐고 물어보는, 순수하게 나를 생각하고 나를 걱정해주는 어머니. 저는 당신에게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아서, 아픔을 참으며 내일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다고 자신을 속이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또다시 내일이면, 내일이라면 모두 다 괜찮아질 거라고 믿으며, 저는 내일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고양이가 스쳐 지나간다. 자동차 밑에서 겁에 질린 눈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다.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펴본다. 회색 건물이 줄줄이 늘어 서 있고, 길게 깔린 아스팔트가 놓여있다. 뒤를 돌아봤다. 마찬가지의 풍경. 앞이나 뒤 어디를 보아도 똑같은 풍경만 이어지고 있다. 나는 어디로 가고 있던 중이었던가. 머리가 지근거리며 아파왔다. 손가락으로 지그시 누르며 두통이 가시기를 기다렸다. 집을 나온 것은 어렴풋이 기억이 난다. 분명 집을 나와서 어디론가 가기 위해 걸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주위를 둘러보아도 특별히 어디를 가리키고 있는 표지판 같은 건 없다. 낯선 풍경, 마치 나라는 인간이 갑자기 하늘에서 여기로 떨어진 듯이 어디에서도 오지 않았고 어디로도 가고 있지 않은 이방인 같다. “오래 기다렸지?” 소녀는 환한 미소로 말한다. ‘차가 막히는 바람에…, 미안해!’ 라고 덧붙이며 두 손을 모아 연거푸 고개를 숙인다. 눈을 감았다가 다시 뜨고 앞을 바라보았다. 아무도 없다. 소녀는 잔영을 남기지 않고 사라져 버렸다. 나는 길을 걸어갔다. 멀리 보이는 광장까지, 거기가 내가 도달할 장소라고 생각하면서 걸었다. 광장에 도착하고 나서는 치솟아 오르는 물기둥을 쳐다보며 누군가를 기다렸다. 누구를 만나야 하는지 아직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환한 미소를 짓는 소녀의 이미지가 스쳐지나간다. 연인…일까. 생각했다. 물방울이 하얗게 퍼져 대기로 녹아들어가는 아름다운 모습을 바라보면서. 광장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누군가를 기다리며 서 있다. 나도 그들 중에 하나지만 기대에 찬 표정을 짓고 있는 그들, 혹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더 초조해지는 그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표정이 메말라 있었다. 그렇다. 그들은 감정이 풍부했다. 나는 그저 여기까지 걸어왔고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을 언제 올지도 모르는 사람을 기다리고 있다. 내가 거기에 있어야 하기 때문에 있어야 한다는 기분으로, 당연하게 해야 하는 일을 한다는 기분으로 서 있었다. 나는 느긋한 마음으로 주변을 꼼꼼히 관찰했다. 각자의 이유로, 각자의 기대를 품고 그들은 서 있다. 나와 같은 이유로 여기에 서 있는 사람은 거의 없어 보이지만, 그 외의 이유라면 뭐든 만들어서 이름 붙이기만 한다면 가능할 것 같았다. 휴대폰이 울리고 있다. 주머니에서 울려 퍼지는 익숙한 벨소리를 들으며 휴대폰을 꺼내어 쥔다. 낯설면서도 애타게 기다렸다는 생각이 드는 이름이 휴대폰 액정에서 반짝이고 있다. 받아야 하나, 받지 말아야 하나. 초조해진 마음에 주변을 둘러보았다. 간절히 도움을 바라는 마음으로 대상을 찾았다. 하지만 누구 하나 나를 도와줄만한 사람은 없었다. 그게 아니지. 누구도 도와줄 수 없으니까 없는 거다. 마음속으로는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애타게 누군가를 찾아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벨소리가 열다섯 번, 열여섯 번 점차 그 숫자를 더해간다. 스물 번이 넘으면 그녀는 전화를 끊을 것이다. ‘전화를 받아!’ 라고 생각하면서도 손은 움직이지 않았다. 통화 버튼을 누르기만 하면 그녀와 나 사이에 얇은 선이 이어진다. 스물 번째 벨소리가 울린다. 반사적으로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낯익은 그녀의 목소리가 휴대폰에서 흘러나온다. 잔뜩 긴장해버리는 바람에 온 몸에 땀이 흐르는 게 느껴졌다. 피부에 옷이 축축하게 달라붙는다. “응. 나야.” 심호흡을 크게 하고 휴대폰을 귓가에 대었다. “미안해. 만나서 이야기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도저히 갈 수가 없었어. 그러니까 정말 미안하지만, 전화로 이야기할게. 괜찮아?” “괜찮고 말고 할 게 어디 있어. 오늘이 힘들면 내일, 내일이 힘들면 그 후에 네가 괜찮을 때 만나면 되는걸. 신경쓰지마.” “…….” “무슨… 일이야?” 떨리는 목소리로 그녀에게 물었다. 한참동안 말을 잇지 못하던 그녀가 옆에 있는 누군가와 뭔가를 이야기하더니 뭐가 우스운 건지 몰라도 피식하며 웃었다. “말해야 한다고 계속 생각했어. 아니, 말 보다는 직접 보여주는 게 더 낫지 않을까 생각해서 계속 미루어 두고 있었지. 그렇지만 말이지.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그냥 말만 하면 될 것 같아.” “그러니까,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야? 오늘 나올 수 없다고 말하려고 했지만 나올 수 없어 미안하다면 그걸로 괜찮아. 바쁘다는걸 어떻게 하냐. 그래, 어쨌든 오늘은 못 만나는 거지?” 그녀는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고 있는 듯 드문드문 이빨 사이로 새어나오는 바람소리가 귀에 거슬렸다. 나는 도저히 가만히 기다릴 수가 없었다. 어서 전화를 끊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미안하지만, 너에게 내일은 없어.” “그게 무슨 말이야? 내일이 없다니.” “우리에게는 더 이상 내일이 없다는 거야.” “그러니까 그게 무슨 말이야?” “정말 넌 바보구나. 그런 것도 이해 못하고. 내가 너에게 미안해 할 필요도 없겠다.” “무슨 병이라도 걸린 거야?” 그녀는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어쩜 그렇게 착하니, 넌. 그게 네 매력이긴 하지만, 그만큼 쓸모없기도 해.” 응어리 같은 답답한 무언가가 마음 한 구석에서 반복해서 외치고 있다. 그녀는 분명히, 분명히…. 그래 눈치 채고 있긴 했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머리로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마음으로는 분명히 이해하고 있었다. “나 새로운 사람이 생겼다. 그는 나와 잘 어울린다고 생각해. 너와는 달라. 강하고 나를 잘 이끌어 줘. 만나 때마다 강렬한 추억만을 선사해줘. 우리의 만남? 웃음도 안 나와. 난 어째서 우리가 만나야 하는 건지, 시간 낭비라고만 생각했어. 그 생각이 지금의 그와 만나면서 더 확실하고 선명하게 떠올랐어. 그러니까 우리들 더 이상 만나지 말자. 정말로 미안한 말이지만, 나는 너와 사귀었다는 사실이 창피하니까, 정말 창피해서 열 받아.” 짧게 숨을 몰아쉬면서 그녀는 마저 말을 이었다. “앞으로 길에서 만나도 아는 척하지 말자.” 단숨에 숨을 내뱉듯이 나를 향해 거친 말들을 퍼부었다. 처음이었다. 그녀가 나에 대해 말을 한 것은. 지금까지 그저 착한 사람이라고, 내가 사귀자고 했을 때도 그냥 그 말만 했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그렇게 말을 한다면 그게 사실일거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나와는 다르다. 정말 분한 마음도 있었지만, 그녀의 행동과 말이 나를 깨닫게 만든다. 나는 그녀가 말하는 그저 그런 인간일 뿐일 테니까, 그녀와는 처음부터 어울리지 않았다. 그녀가 보기에 단지 착하다는 성격 빼고는 나를 봐줄만한 게 없는걸. “그리고…, 아니다. 더 이상 무슨 할 말이 있겠냐. 그만하자.” 단지 하나, 단지 하나의 의문이 가슴 속을 파고들었다. “언제부터, 언제부터였어? 그와 만나기 시작했던 것이.” 그녀는 나를 비웃었다. 피식하는 비웃음 소리가 또 들렸다. “알 필요 없지 않아? 설령 너와 만나기 시작했을 때부터라고 해도 그게 무슨 의미가 있어?” “…….” “곧 시작할거 같으니까, 이제 그만 끊자. 잘 지내길 바래. 안녕.” 그녀가 전화를 끊었다. 귓가에 그녀의 마지막 말과 전화가 끊긴 소리만이 울려 퍼진다. 나는 울고 있다. 눈물이 방울져서 눈에서 흘러내린다. 분수대를 바라보며 흐르는 저 물줄기가 내 눈물을 감추어 주기를 바라고 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울고 나면 괜찮아 질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처음부터, 모든 것이 처음부터 잘못 되고 있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나는 그런 내 불안을 숨기기 위해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은 척하고 싶었다. 그래, 어렴풋이 그녀가 다른 사람과 사귀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오늘이 지나가고 내일이 지나가면, 그렇게 아무런 일 없이 지나가버리기만 하면 그녀와 나는 여전히 연인 관계로 남아 세상을 살아가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오늘은 그녀의 생일날이다. 주머니에 든 티켓을 꺼냈다. 오늘 그녀와 함께 보고 싶었던 콘서트. 그녀가 몇 개월 전부터 보고 싶다고 말했던 것으로 당시 전부 매진되어 버려서 매우 안타까워했었다. 그래서 나는 그녀를 기쁘게 해주기 위해 간신히 티켓을 구하고 오늘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우선, 그녀에게 영화를 보러가자고 약속을 잡은 다음 시간에 맞춰 나왔을 때 티켓을 보여주려고 했다. 티켓을 받아든 그녀는 눈에 띄게 웃으며 도대체 어디에서 이걸 구했냐고, 나를 두고 대단하다고 하며 마지막에는 사랑한다고 말하리라. 그리곤 그녀의 생일을 위해 준비한 케이크를 먹으며 환상적인 데이트가 펼쳐질 거라고 상상했다. ‘찢어버리자. 이제 필요 없어.’ 티켓을 꽉 쥔 후 힘을 줘서 찢으려는 순간 차가운 무언가가 손에 닿았다. “아깝지 않아요?” “네?” 환청과도 같은 말이 들렸다. 몇 초간의 침묵이 흘렀다. “아깝지 않으세요?” 가벼우면서 높은 음색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정신을 차리고 티켓을 쥔 손을 쳐다보니 거기에는 검은 매니큐어로 손톱을 칠한 길고 가는 손가락이 있었다. “찢어버리면 천벌을 받을 거예요. 아니지, 그 표를 구하려고 했던 사람들을 모욕하는 꼴이 된단 말이에요.” 분명 아직 성인이 되지 않은 앳된 소녀의 목소리이다.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상상대로 거기에는 소녀가 있었다. 아니, 소녀라고 부르기에는 적당하지 않을지 모르겠다. 어쨌든 굉장한 모습을 한 소녀가 서 있다. 소녀는 흰 셔츠와 검은 스커트가 대조되는 옷차림이다. 금색 선이 질서정연하게 그어져 있고 주름이 곳곳에 잡혀 왠지 비싸 보이는 셔츠는 ‘고풍스럽다.’라고 표현할 수 있을 정도였다. 검은 스커트는 레이스가 여러 줄로 쌓여 있어 접근하기 힘든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마치 비주얼 계열의 인형이 그대로 인간으로 태어나서 거리를 거닐고 다니는 듯 했다. 그러니까 내가 소녀를 보고 느낀 감정은, 스크린 너머로만 보았던 배우가 우연히 눈앞에 나타나서 어쩔 줄 몰라 당황스러워하는 느낌과 비슷하다. 그런 감정은 소녀가 아름다거나, 추하거나, 그리고 평범하거나, 어떤 모습이라고 하더라도 눈에 비친 첫 모습만으로도 주눅이 들 수밖에 없게 만든다. 소녀의 대담한 모습은 전기가 파짓하고 순간적으로 흘러 온 몸이 감전 된 것처럼 부르르 떨리게 했다. 조금 더 자세히 소녀를 들여다보니, 놀랄 일은 소녀의 모습만이 아니었다. 소녀의 몸 곳곳에 심어진 많은 액세서리가 은근히 소녀를 뽐내고 있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액세서리는 단연코 코부터 오른손목의 은팔찌까지 이어져 있는 얇은 사슬이다. 이음새가 촘촘하고 곡선을 그리듯 이어져 있는데, 손이 움직이는 범위까지 예상을 했는지 적당한 정도의 폭을 유지하고 있었다. 코에 있는 조그마한 갈고리 모양의 피어싱 끝에 사슬을 걸고 마찬가지 모양의 은팔찌에 걸어 연결했다. 아마도 은팔찌와 쇠사슬이 하나의 세트이고 코의 피어싱이 옵션이겠지. 그 외에도 언뜻 보기에 새의 형상, 알바트로스를 나타내고 있는 은색 펜던트가 은색 줄에 매달려 목에 걸려 있고, 가죽, 천 등 여러 가지 재료로 만들어진 팔찌가 겹겹이 양 손목에 끼워져 있었다. 또한 예쁘고 앙증맞은 작은 보석들이 다이아몬드 형태를 만들고 있는 귀걸이가 귓불에 매달려 있었다. 그리고 귓불의 반대편, 즉 귀의 제일 위쪽에는 은색 피어싱이 당연하다는 듯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저 정도 착용하고 나면 손의 무게보다도 장신구의 무게가 더 나갈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너무 오랫동안 빛을 바라보고 있어 눈이 아파진 것처럼 잠시 고개를 돌렸다. 머릿속으로는 전에 이 소녀를 만난 적이 있는가를 고민하고 있었다. 만약 있었다고 한다면, 이렇게나 기억하기 쉬운 아이도 없을 테니 아마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한 사이임에 틀림없다. 고개를 돌려 하늘을 쳐다보았다. 차가운 가을바람이 코끝을 스친다. 하늘 높은 곳에서 밤이 오기 전이라 노랗게 퍼지는 노을이 가득 해서, 이제 곧 어둑어둑해지려한다는 것을 알았다. 높은 하늘과 그늘이 지는 지평선 그리고 묘한 모습으로 나에게 다가온 소녀. 묘하고 아름다우며 그리고, 그리고 어쩌면 사랑스러울지도 모를 그런 소녀가 나의 앞에 있다. 검은 눈동자로 나를 가득 담고 있는 소녀가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에 서 있다. 환상…에서만 보았던 소녀가. 나의, 꿈에서 본 나의 소녀가 나에게 말을 걸었다. 믿을 수 없었다. 숨을 깊게 들여 마셨다. 강하게 가슴을 치는 심장 소리를 들으며 마주보고 있던 시선을 밑으로 내려 깔았다. 도저히 정면으로 쳐다볼 수 없다. 분명 빨갛게 얼굴이 달아올라 있을 테니까, 흉한 꼴이겠지. 입술을 깨물었다. 고통 속에서, 꿈이라면 이런 황홀한 느낌에서 조금이라도 깨어나기를 기원했다. 눈을 뜨자 소녀의 하반신이 보였다. 소녀는 그물 스타킹에 무릎까지 올라오는 가죽 부츠를 신고 있었다. 검은 스커트와 부츠 사이에 드러난 매끄러운 피부가 검은 격자무늬로 감싸져서 분명 어려 보이고 청순해 보인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였는데도, 온몸에 요기가 흘러 넘쳐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완곡한 곡선을 그리고 있는 소녀의 발은 군더더기가 없고 알맞게 근육이 발달해 있어서 완벽했다. 실례인줄 알면서도 왠지 만져보고 싶은 마음이 계속 떠올랐다. “애인에게 차였어요?” 소녀는 대뜸 묻는다. 나는 잠시 눈을 감고 소녀와 이야기를 해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했다. 오래 생각할 것도 없이 내 몸이, 내 마음이 소녀를 바라고 있었다. “네. 차여버렸네요. 간신히 구한 티켓인데, 쓸모가 없게 되어 버렸어요.” “확실히 아깝긴 해요.” “…….” “…….” “정말 구하기 힘들었는데, 어떻게 구한 건데….” “확실히 구하기 힘들죠. 그 티켓은.” “초면에 이런 말 하는 게 정말 이상하지만 말이에요. 저 정말 힘들게 구했어요. 이 티켓.” “그래요? 어떻게 구하셨는데요?” “제일 처음에는 티켓을 파는 모든 인터넷 사이트에 들어가서 있는지 확인을 했죠. 아무데도 없었어요. 그래서 그 다음엔 갈 수 있는 모든 곳에 닥치는 대로 돌아다니면서 찾았어요. 거의 이 주일 정도 걸렸을 거예요. 혹시라도 어디에 있다는 말이 있으면, 수업도 제치고 아침 일찍 그 상점에 가서 문을 열 때까지 기다렸죠. 그래도 꼭 저 보다 먼저 오는 사람들이 있어서, 그들이 먼저 사서 가버리곤 했죠.” “그래서요?” “결국 있는 대로 돈을 끌어 모아서 열배나 되는 가격으로 구입했어요. 모든 돈, 쓸 수 있는 모든 돈을 의미해요. 교통비, 식사비 그리고 저축 해둔 돈까지. 그렇게 해서 마련한 티켓인데. 어떻게,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 거죠?!” “정말로 좋아했던 사람인가 보네요. 그 정도로 정성을 쏟았다니….” “좋아한 건지, 좋아하지 않은 건지는 모르겠어요. 그녀가 보고 싶다고 했으니까, 내가 그녀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것이라곤 이런 것뿐이니까요. 그랬는데! 보여주기도 전에 그녀가 나를 차버렸죠. 다른 사람이 생겼대요. 나보다 더 좋은, 만날 때마다 강렬한 자극을 준다는 그런 사람이 생겼다고 이제 저는 필요 없다고 하네요. 방금도 뭔가를 같이 하고 있나 봐요. 이제 곧 시작한다고, 그러니까 너를 정리해야 한다고 말했어요. 그게 마지막 인사말이었어요. 마지막까지 나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자기 멋대로 말하고 끊어버렸어요.” 그녀는 소리 높여 웃으며 말했다. “확실히 당신이 그렇게 생기긴 했어요.” “이 사람이!” 화가 나서 잔뜩 얼굴을 찌푸린 채 고개를 들어 소녀를 쳐다보았다. 소녀는 사슬이 이어진 손을 입가로 가져가 손바닥으로 입을 가리고 천천히 웃고 있었다. 눈가에 가늘게 잡힌 한 가닥 주름이 선명해졌다가 희미해졌다가를 느릿하게 반복한다. “그래요, 나 그렇게 생겨 먹은 사람이니까. 이제 됐죠? 건들지 말고 갈 길이나 가요.” 소녀는 가늘게 뜬 눈으로 나를 지그시 쳐다보다가 ‘그래요.’라고 말하며 분수대 너머로 갔다. 나는 멍하게 서서 사라져 가는 소녀의 뒷모습을 쳐다보고 있었다. 분수의 하얀 기둥에 완전히 가려져 보이지 않게 되었는데도 나는 계속 시선을 뗄 수 없었다. “가버렸나.”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가로 저었다. 소녀가 없어졌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렸다. 중간에 한번이라도 돌아보았다면 마음이 편해졌을지도 모르는데…. 그 순간 어깨에 누군가의 손가락이 얹히는 게 느껴졌다. “초면인데 가버렸나 라고 말하는 게 우습지 않아요?” 소녀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어찌된 영문인지 몰라 멍청하게 서 있었다. “무슨 말이에요? 갑자기 나타나선 하는 소리란 게!” 고개를 돌려보니 거기에는 여전히 매력적인 모습으로 서 있는 소녀가 있었다. 앞에 있다가 뒤로 가버렸을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하지만 다른 의미로써 나는 소녀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렇다. 갑자기, 정말로 갑자기 소녀에게 부탁하고 싶은 일이 생각났다. 어쩐지 부탁 해버리면 그렇게 해줄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들기도 했고, 그렇지 않더라도 그저 말이라도 꺼내보고 싶었다. 그래 더 이상 비참해져 떨어질 곳도 없으니까, 용감하게 도전하고 후회하지 않도록 하자는 생각이 든다. 어떤 응답이라도 나름대로의 의미는 있으니까. “저기….” 무언가를 말하려고 하던 소녀는, 나지막하게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듣고 큰 눈동자로 나를 쳐다본다. “저기 말인데요. 저와 같이 콘서트 가지 않을래요?” “…….” 잠시 소녀는 생각했다. 그리고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좋아요. 단 조건이 있어요.” 소녀의 목소리는 약간 높으면서도 중심이 잘 잡힌, 한번 들으면 잊지 못하는 개성이 강렬하게 담겨 있었다. “한 시간 당 만원, 데이트 중의 모든 비용은 그쪽이 부담.” “…….” 놀란 눈으로 소녀를 쳐다보며 속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녀는 사람을 다루는 데 능숙했다. 애초부터 이런 것을 위해 나에게 접근 했던 것이다. 사람이 많은 곳에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을 관찰하다가 그들 중에 적당한 먹잇감을 찾아 말을 건다. 절망에 빠져 있는 그들이 소녀에게 모든 이야기를 털어놓고 슬픔을 함께 나누려 할 때, 친절하게 받아주는 척 하면서 적당한 순간에 돈을 요구한다. 원조 교제와는 느낌이 다르지만 데이트 원조라고 하면 적당할까. 소녀는 처음부터 나에게 돈을 요구할 생각이었다. 슬퍼하는 나를 보며, 돈의 액수를 계산하고 있었겠지. 소녀에게 기대려고 했던 나의 마음이 얼마나 안일한 생각인지 깨닫게 한다. “그게 목적이었던 거야?” 차가운 목소리로 소녀에게 말했다. 소녀에 대한 나의 마음이 급속하게 식어가는 게 느껴졌다. “맞아요. 당신도 알고 있나보네요. 돈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표정이 변하는 걸 보면.” 뻔뻔한 소녀의 말에 더욱 기분이 나빠졌다.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나는 말했다. “알고 있어. 나는 너에게 줄 돈 같은 건 없으니까 그만 가줘. 짜증나기 시작하니까.” “정말로 제가 필요 없을 거라고 생각해요? 저는 당신이 제가 없으면 안 되는 이유를 한 가지 알고 있어요. 절대적인 이유이죠. 아마 당신도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당신 자신의 입으로 나에게 말했으니까. 눈치 채고 있지 않을 뿐이겠지만요.” “네가 나를 만 난건 고작 몇 분 전이야. 아니 그 전부터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고 해도, 그래봤자 한 시간 밖에 안 된다고. 그런데, 그런 소리를 지껄이는 걸 믿으라는 말이야?” “그래요. 우리는 고작 몇 분밖에 만나지 않은 관계예요. 하지만 그 짧은 시간 동안 얼마나 많은 일이 있었는지 당신도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무엇보다도 당신 시선의 변화만 해도 정말 대단했죠. 처음에는…” 나는 손바닥을 들어 소녀의 입을 가로 막았다. “알겠어. 알겠으니까 조용히 해.” 소녀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이 저를 필요로 하는 이유, 그건 데이트를 하면서 생각해보는 게 어때요? 데이트 코스는 당신이 어렵게 구한 티켓을 사용하죠. 버리기 보다는 그게 더 나을 테니까요.” 소녀는 영악했다. 쓸 수 있는 모든 것은 사용한다. 상대에게 파고들어 진득하게 모든 것을 빨아낸다. 마치, 모기와도 같이 빨아내고 또 빨아내버린다. 불쾌했다. “어째서, 너와 내가 콘서트를 보러 가야 하는 건데? 거기다가 돈을 지불해가면서 말이지. 뭔가 불공평해.” “그건, 당신이 결정할 문제이겠죠. 할겁니까, 말겁니까?” 소녀의 검은 눈동자는 진지했다. 깊고 검은 눈동자의 소녀를 쳐다보고 있으면, 분하지만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래도 좋다. 소녀가 하자는 대로 하여도, 이대로 집으로 돌아가는 것도 아무래도 좋았다. 소녀는 가만히 나를 쳐다보고 있다. 어서 결정을 내리라는 눈빛이다. “한 시간 당 만원이라고 했지?” “그래요. 그리고 데이트 중의 모든 비용은 당신이 부담.” “완전히 손해군. 어서 가자. 늦겠어. 콘서트.”
덜컥 거리는 지하철 덕분에 잠들지 않고 있다. 가끔 끼익 하는 쇠를 가는 소리가 들려오기도 했다. 손잡이를 잡고 가만히 서 있었다. 피곤했는지 가만히 눈을 감고 고개를 숙이고 있는 소녀가 옆에 있다. 콘서트를 마치고 집으로 가는 길, 앞으로 몇 정거장만 더 가면 소녀는 떠난다. 많은 일이 있었던 하루다. 애인에게 차이고, 이상한 소녀에게 위로받고, 찢어버리려고 했던 콘서트 티켓을 기대하지 않았던 사람과 함께 보내기 위해 쓰고, 그리고 데이트를 하는 대가로 돈을 지불하기 까지. 생각해보면 당돌한 아이다. 한 번도 보지 못한 사람에게 말을 걸고 자기를 원하게 만들고 부정할 수 없도록 단단히 상대를 옭아맨다. 한순간에 지나가버리는 유혹이었다면 돈을 주지 않을지도 모른다. 확실히 나도 처음에 그런 마음이 없었던 건 아니니까, 시간은 함께 보내지만 돈은 주지 않는다는 마음. 하지만 소녀는 대단했다. 나를 조종하여, 진실을 알게 했으며 나에게 존경심을 가지게 만들었다. 아니, 어쩌면 소녀와 데이트를 하면서 잃어버렸던 나 자신을 찾았기 때문에 그런 마음을 가지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소녀가 나에게 제시했던 이유. 콘서트 장에 가지 않으면 안 되며, 반드시 자신과 함께 가야 한다고 주장한 이유는 확실했다. 소녀는 거기에서 내가 그녀를 만나게 될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나는 한 번도 거기에서 그녀를 만나게 되리라고 생각한 적이 없는데도 말이다. 나는 소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었다. 소녀의 긴 생머리는 허리까지 닿아 있었고 오랜 시간 빗지 않아 끝이 조금 말아 올라와 있었다. 까칠한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소녀의 옆모습을 유심히 관찰했다. 앞으로 만날 일은 없을지도 모른다. 왠지 그런 마음이 들었다. 나는 소녀의 이름도, 소녀의 집도, 소녀의 마음도 어느 것 하나 알지 못한다. 아마도 소녀는 하루를 함께 지내기 위한 상대를 만나려고 했던 것이겠지. 딱 나와 같은 사람을, 사람들을. 소녀의 귀는 여러 가지 흉터 자국으로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소녀의 귀에 난 상처는 분명히 소녀가 자신의 손으로 구멍을 뚫으려고 하다가 났으리라. 나 또한 그런 상처를 가지고 있기에 물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정말 바보 같은 짓이었다. 막 대학에 들어와 친구가 하고 있던 귀걸이가 멋져보여서, 그날로 같은 귀걸이를 샀다. 그리고 귀걸이를 끼우기 위해서 내 손으로 직접 귀를 뚫었다. 바늘을 찔러 넣으려고 했는데 도저히 할 수가 없어 한참동안이나 망설였다. 그러다가 어떻게 결심을 하게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기억이 나는 건, 계속 흘러나왔던 피와 매우 선명하게 떠오르는 고통이다. 소녀도 아마 비슷한 경험을 했으리라. 자기 손으로 뚫는 것과 제대로 전문가의 손으로 뚫는 것은 흔적이 다르다. 소녀의 흉터는 내가 내 손으로 뚫은 흉터와 같으니까 분명히 소녀도 비슷한 경험을 겪었음이 틀림없다. 아무리 지우려고 해도 지워지지 않는 인생이라는 종이에 새긴 낙인처럼 당시의 고통과 피의 흔적은 잊으려고 하면 할수록 더욱 강해지리라. 그래, 바로 이 사실 하나만은 내가 소녀에 대해 아는 유일한 것이다. 지금 이렇게 소녀를 쳐다보며 머리카락을 쓰다듬고 소녀의 상처를 생각하고 있는 시간은 평범한 연인 관계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상대를 걱정하고 상대를 위하는 그런 평범한 연인 관계, 돈으로 이루어진 지금의 관계가 아니라 정말로 평범한 연인 관계여야만 가능하다고 마음으로 긍정한다. 비록 몇 분이지만 그 시간만큼은 진정 소녀의 연인이 된 게 아닌가 하는 착각을 하고 있다. 정말로, 정말로 나는 큰 꿈을 꾸며 제멋대로의 세계에서 착각을 하고 있다. 제발 깨어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램으로. “저, 여기서 내려요.” 소녀는 살며시 머리카락을 쓰다듬고 있던 내 손을 밑으로 내렸다. “몇 분 더 지나긴 했지만, 정확히 오 만원이네요. 고마워요. 그럼 잘 있어요.” 나는 입 밖으로 튀어나오려고 하는 말을 담아두려고 노력했다. 노력하고, 또 노력했지만 한 발자국씩 멀어져 가는 소녀의 뒷모습에 가슴이 심하게 곤두박질 쳤다. 도저히 참을 수 없어 달려가 소녀의 어깨를 잡아끌었다. “조금 더 같이 있어줄 수 없어?” 역에 도착한다는 방송 음이 들리고 전차가 천천히 서고 있었다. 소녀는 슬픈 눈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역에 도착해서 문이 열릴 때까지, 그리고 문이 닫힌다는 차임벨이 들려 올 때까지. 소녀는 가만히 어깨를 비틀어 내 손에서 빠져나갔다. “미안해요. 여기까지가 당신과 저의 운명이에요. 잘 지내요.” 소녀는 그렇게 말하고 전차 밖으로 나갔다. 막 빠져나가는 소녀의 손을 잡아 끌어당겼다. 놓치고 싶지 않았다. 소녀를 놓치면, 여기에서 이 손을 놓아버리면 두고두고 후회 할 테니까, 언제 어디를 가더라도 소녀만을 생각 할 테니까. 소녀는 고개를 돌려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나를 묵묵히 쳐다보고 있었다. 곧 문이 닫힌다. 소녀도 나를 원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소녀를 원하고 있으니, 우리는 제법 잘 어울리는 연인이 되지 않을까. 멋대로 상상하고 멋대로 힘을 얻어 소녀를 쥔 손을 강하게 잡는다. “정 그러고 싶으면, 이리로 와.” 소녀는 나지막하면서도 강하게 나에게 말했다. 얼떨결에 나는 소녀를 잡고 있던 손을 놓아버렸다. 그 순간 문이 닫히며 소녀와 나 사이를 가로 막는다. 소녀는 문 너머에서 곧 눈물이 방울져 떨어져 내릴 것만 같은 슬픈 눈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다. |

그녀의 매혹 <2006년 11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