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와 그녀의 매혹 2006.05.17
외로웠다. 정확히 외로웠다고 느끼고 있다. 새하얀 백지에 검은 잉크로 그려나가는 걸음으로 지금까지 왔어. 단 하나의 흔적만 남았다. 명백하게 그려진 색의 구분은 너와 나를 가로질러 놓고 있어서, 아무도 여기에 닿으려고 노력하지 않았지. 그러니까 외로웠다. 나는 엄지손가락에 힘을 주어 연필을 움직였다. 비뚤비뚤한 글자가 뭔가를 쓰고 있어. 그저 그런 움직임, 어떤 의미도 없다. 엄지손가락은 다루기가 힘들어 글자를 쓰기에는 적당하지 않지. 우스운 이야기야. 제일 힘이 센 주제에 글자도 제대로 쓰지 못하는 손가락이라니. 그러고 보면 엄지손가락은 나머지 네 손가락과는 떨어져 있다. 마치 왕이라는 듯이 누구도 간섭할 수 없도록 움푹 판 해자를 만들고 거리를 두고 있다. 어째서 혼자 지내고 있는 걸까. 다른 손가락과 어울려도 괜찮지 않아? 연필이 삐걱거린다. 안에서 부터 부서지는 소리, 손댈 수 없는 깊은 곳에서부터 시작해서 조용히 밖으로 나오고 있지. 밖에 금이 가버리면 이미 늦었다는 건 알고 있어. 슬퍼하며 지금까지 고마웠다고 잠시 묵념한 뒤 버리면 그만이라고 생각해. 기이할 정도로 힘을 주어 써도 잘 굴러가니까. 이상한 소리가 들려도 그냥 그대로 남겨두고 있다. 이상한 소리가 들려온다. 배웠던 많은 기호가 머릿속에서 조합되며 연결되고 있어. 나를 부르고 있나? 그만 불러도 될 것 같아. 이제 알겠어. 누군가 확실히 나를 부르고 있다. 그는 창백한 색으로 내 주위를 물들여 가고 있다. 조금만 더 상냥한 색으로 칠해줄 수 없는 걸까. 메아리가 굽이쳐서 머리에서, 목에서, 등에서, 다리까지 타고 내려가고 있다. 잔혹한 색이야. 나를 부르고 있는 당신의 목소리는.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던 것 같다. 어디에서 목소리가 들려오는지 깨닫고 있지 못하니까, 뭐든지 긍정하고 있었다. 그렇게 하면 맞지 않으니까, 잘했다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항상 나에게 긍정하는 법만을 배워야 한다고 했다. 인생을 살면서 당신이 배운 가장 큰 이치는 자신에게 뭔가를 요구하면 항상 그대로 따르고 남이 뭔가를 말하면 긍정하는 것이라고 했어. 촉촉하게 젖어드는 기억은 나를 불러일으키는 촉매제 역할을 했어. 기억 속에 묻혀 있던 너의 이름을 꺼내어 지울 수 없게 만들어버렸지. 나에게 요구했던 너. 부모님의 말에 따랐을 뿐인데, 너는 나의 뺨을 힘차게 때렸지. 그리고선 내가 흘리는 만큼 너도 눈물을 흘렸다. 나, 아직도 기억하고 있어. 어째서 그렇게 사냐고 말했잖아. 그 목소리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어. 귀가 찢어질 정도로 높은 음 이였지. 단단한 송곳이 후벼 파고 있는 느낌이었다. 매우 날카로운 색으로 나에게 전해졌지만, 나쁘진 않았다. 왠지 바이올린 음이 들려오는 것 같았어. 현을 튕기며 면을 마찰시키는 음, 날카롭지만 조화로운 음이었으니까. 그래, 그런 느낌의 음이 귓가에 맴돌고 있다. 네 느낌은 나에게 전해지고 있다고 생각해. 내가 외롭다고 느끼는 만큼 너는 너의 집단 안에서 만족하게 되겠지. 나와는 다른 개체가 아닌 집단으로 너는 생기도록 되고 있겠지. 너에 대한 나의 느낌은 그렇게 그늘진 구석에서 흩뿌려지고 있어. 그 감각 오래 버티기는 힘들겠지만 아직까지는 남아 있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