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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arch| 바그너 전기
어린 시절 리하르트 바그너는 1813년 5월 22일에 독일 라이프치히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말단 도시 공무원이었는데, 리하르트의 출생 후 여섯 달 만에 세상을 떠났고, 1814년 8월에 그의 어머니는 배우 루드비히 가이어와 재혼했다. 가이어는 사실 이 아이의 아버지라는 소문이 있는데, 어쨌든 리하르트가 여섯 살 때에 세상을 떠나고, 그는 어머니에 의해 양육되었다. 젊은 리하르트 바그너는 극작가가 되겠다는 야망을 갖고 있었고, 음악에 대해서는 처음에 그가 쓰고 상연하고 싶었던 극을 한층 향상시킬 수단으로서 관심을 가졌다. 그는 곧 음악을 공부하기로 방향을 돌렸고, 그것을 위해 라이프치히 대학에 1831년 입학했다. 초기, 그의 음악에 영향을 준 인물은 루트비히 판 베토벤이었다. 1833에, 나이 스물의 바그너는 그의 첫 완성된 오페라인 요정을 작곡했다. 이 오페라는 명백히 칼 마리아 폰 베버의 양식을 모방한 것으로, 반세기 넘게 상연되지 않았으며, 초연은 그의 사후 직후인 1883년에 뮌헨에서 있었다. 그 동안에 바그너는 마그데부르크와 쾨니히스베르크의 오페라 극장의 음악 감독으로서 약식 계약을 맺었으며, 그 동안에 그는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자에는 자에 기초한 연애금제를 썼다. 이 두 번째 오페라는 1836년에 마그데부르크에서 상연되었지만, 반응은 그리 좋지 않았다. 1836년 11월 24일에 바그너는 여배우 Christine Wilhelmine "Minna" Planer와 결혼했다. 그들은 리가로 이사해서 바그너는 거기에서 지역 오페라단의 음악 감독이 되었다. 몇 주 후에, Minna는 군인과 야반도주했고, 그 군인은 나중에 단 돈 한 푼도 안 남기고 그녀를 떠나 버렸다. 바그너는 Minna를 다시 맞아들였지만, 이 일은 30년 후에 비극적으로 끝날 문제 많은 결혼 생활의 시작이었다. 1839년까지, 부부는 많은 빚을 지게 되었고 그래서 그들은 빚쟁이들을 피해 리가를 떴다 (빚은 그의 남은 생애 동안 바그너를 따라다녔다). 그들의 도주 행각 동안에, 그들은 영국으로 가는 항로에서 폭풍우를 만났는데 이 경험이 그의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의 영감을 제공했다. 바그너는 파리에서 여러 해를 보냈으며, 거기에서 리하르트는 기사를 쓰고 다른 작곡가의 오페라를 편곡하는 것으로 생계를 이었다.
드레스덴 바그너는 그의 세 번째 오페라 리엔치를 1840년에 썼다. 뜻밖으로 이 오페라는 독일의 작센 주의 드레스덴 왕립 극장에서의 상연이 받아들여졌다. 1842년에 부부는 드레스덴으로 이사했으며, 리엔치는 상당히 성공적으로 상연되었다. 바그너는 드레스덴에서 다음 여섯 해를 보냈으며, 결국 작센 왕립 지휘자로 임명되었다. 이 기간 동안에 그는 그의 첫 두 중기 오페라인 방황하는 네덜란드인과 탄호이저를 쓰고 상연했다. 바그너의 드레스덴 체재는 바그너의 좌익 정치의 가담으로 끝나 버리고 말았다. 국가주의 운동은 독립 독일 주들에서 힘을 얻고 있었으며, 자유와 약한 주들의 한 나라로의 통일에 대한 열망에 부응하는 것이었다. 리하르트 바그너는 이 운동에서 매우 열성적인 역할을 수행했으며, 극단적인 좌익 잡지인 Volksblätter를 편집하던 그의 동료 August Röckel와 러시아 무정부주의자 Mikhail Bakunin 등을 포함한 손님들을 받아들였다. 작센 정부에 대한 널리 퍼진 불만은 1849년 4월에 작센의 왕 프레데릭 아우구스투스 2세가 국회를 해산하고 사람들이 그에게 요구했던 새 헌법을 거부하면서 결국 끓어 넘쳤다. 5월 폭동이 발발했고, 바그너는 거기에서 사소한 도움을 주었다. 혁명은 초기에 작센과 프러시아 연합 병력에 의해 재빨리 진압되었고, 혁명 주도자에 대한 체포 영장이 발부되었다. 바그너는 처음에는 파리로, 또 취리히로 도망해야 했다. Röckel과 Bakunin은 도망치는 데에 실패했고 오랜 기간의 수감 생활을 감수해야 했다.
망명, 쇼펜하우어, 그리고 마틸데 베젠동크 바그너는 다음 열두 해를 망명 생활로 보내야 했다. 그는 드레스덴 폭동 이전에 로엔그린을 완성했고, 이제 그의 친구 프란츠 리스트에게 그가 없는 상태에서 그것이 상영되도록 간절한 편지를 썼다. 리스트는 꼭 필요할 때의 친구라는 것을 증명하듯 결국 1850년 8월에 바이마르에서 초연을 지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그너는 그 자신이 극심한 개인적 궁핍에 시달렸고, 독일 음악계에서 고립되었으며 아무런 소득도 없었다. 그가 쓰고 있던 음악적 단편은 나중에 거대한 작품인 니벨룽의 반지로 성장할 것이었는데, 공연되는 모습을 볼 가망이 전혀 없어보였다. 그의 아내 Minna는 그가 리엔치 이후에 써 나간 오페라를 좋아하지 않았는데, 점점 우울증이 깊어져 갔다. 결국 그는 단독1)(피부병의 일종)의 희생양이 되었고, 계속적인 작곡에 어려움을 겪었다. 바그너의 취리히에서의 처음 몇 해 동안 일련의 주목할 만한 수필이 나왔는데, "미래의 예술-작품" (1849)에서 그는 음악, 노래, 춤, 시, 시각 예술, 무대 기술 등이 종합된 개념인 "총체예술(종합예술작품)"(Gesamtkunstwerk)으로서의 오페라의 비전을 설명했다;"음악 속의 유대주의" (1850)은 유대인 작곡가를 반대하여 겨냥한 반유대주의적 작품이다; 그리고 "오페라와 드라마" (1851)은 그가 반지 사이클에서 사용하고 있던 미학 개념에 대한 설명을 담고 있다. 계속되는 몇 년 동안, 바그너는 두 개의 독립적인 영감의 원천을 발견하게 되었는데, 이것들이 그의 유명한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창작으로 그를 이끌었다. 첫 원천은 1854년에 그의 시인 친구였던 Georg Herwegh가 그에게 철학자 아르투르 쇼펜하우어의 저작을 소개하면서 그를 찾아왔다. 바그너는 나중에 이를 그의 생애 가운데 가장 중요한 사건이었다고 불렀다. 그의 개인적인 환경은 분명히 그가, 인간 조건에 대한 깊이 비관적인 관점인 쇼펜하우어의 철학을 쉽게 이해하도록 만들었다. 그는 그의 운이 더 나아진 후에도 남은 생애 동안 쇼펜하우어의 신봉자로 남았다. 쇼펜하우어의 주의는 음악이 예술 가운데에서 최고의 지위를 점하며, 이는 음악이 물질계와 연관되지 않은 유일한 예술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바그너는 이 주장을 환영했으며, 그가 그의 "오페라와 드라마" 에서 이와 직접 상반되는, 오페라의 음악이 드라마의 원인에 따라가야 한다는 주장을 폈음에도 불구하고 그와 강하게 공명을 이루었음에 틀림없다. 바그너 학자들은 이러한 쇼펜하우어의 영향이 바그너로 하여금 그의 반지 사이클의 뒤쪽 절반을 포함하는 후기 오페라에서 음악이 더 강한 명령을 하는 역할을 맡도록 했다는 주장을 해 왔다. 많은 측면의 쇼펜하우어적 주의는 바그너의 이어지는 대본에서도 발견된다. 예를 들어, 마이스터징어에 나오는 구두장이 시인 한스 작스는 일반적으로 바그너가 자신을 가장 많이 반영하는 인물로 간주되는데, (실제 인물을 바탕으로 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쇼펜하우어적인 창조의 전형이다. 바그너의 두 번째 영감의 원천은, 비단 상인인 오토 폰 베젠동크의 아내인 시인 마틸데 베젠동크였다. 바그너는 베젠동크 부부를 취리히에서 1852년에 처음 만났다. 오토는 바그너 음악의 팬이었는데, 바그너의 뜻에 따라 그의 땅에 작은 집을 세워 주었다. 1857년까지 바그너는 마틸데에게 푹 빠져 버렸다. 마틸데는 그의 애정에 일부 답했던 것으로 보이지만, 그녀는 그녀의 결혼을 위험에 빠뜨릴 의도는 없었으며, 그녀의 남편에게 그녀와 바그너의 만남을 계속 알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애정 행각은 바그너가 링 사이클을 잠시 제쳐놓고 (이후 12년 동안 재개되지 않았다), 기사 트리스탄과 (이미 결혼한) 귀부인 이졸데의 사랑 이야기에 기초한 트리스탄과 이졸데 작업을 시작하게 했다. 불편한 애정 행각은 1858년에 Minna가 바그너로부터 마틸데에게 보내는 편지를 보게 됨으로서 막을 내렸다. 이어진 대면 후에, 바그너는 혼자서 취리히를 떠나 베니스로 향했다. 그 다음 해에, 그는 다시 파리로 이동해 Metternich의 공주의 노력 덕분에 상연되는 탄호이저의 새 개정판 상연을 보게 되었다. 새 탄호이저의 1861년 초연은 대 실패로 끝났는데, 이는 Jockey Club 소속의 귀족들에 의한 방해 때문이었다. 이후의 공연은 취소되었고, 바그너는 서둘러 도시를 떠났다. 1861년에 바그너에 대한 정치적인 추방이 해제되었고, 작곡가는 프러시아의 비브리히에 머무르면서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어 작업을 시작했다. 주목할 만한 사실은 이 오페라가 그의 작품 가운데에 가장 밝은 작품이라는 것이다. (그의 두 번째 아내인 코지마는 나중에 "미래 세대가 이 독특한 작품 안에서 상쾌함을 찾는다면, 그들은 눈물 속에서 미소가 떠오르는 생각을 하게 될 지도 모르겠습니다."고 썼다.) 1862년에 바그너는 결국 Minna와 이혼했지만, 그는 (또는, 적어도 그의 채권자는) 그녀에 대한 경제적인 지원을 1866년 사망할 때까지 계속했다. 국왕 루트비히 2세의 후원 바그너의 운은 1864년에 국왕 루트비히 2세가 나이 열여덟에 바바리아의 왕좌에 오르면서 극적인 반전을 맞게 된다. 젊은 왕은 어린 시절부터 바그너의 오페라의 열렬한 숭배자였으며 작곡가를 뮌헨으로 데려왔다. 그는 바그너의 상당한 빚을 해결해 주었고, 그의 새 오페라가 상연될 계획을 세웠다. 리허설에서의 각고의 어려움 끝에, 트리스탄과 이졸데는 뮌헨 왕립 극장에서 1865년 6월 10일에 큰 성공을 거두며 초연되었다. 그 때 바그너는 또 다른 애정 행각을 벌이게 되는데, 이번에는 바그너의 가장 큰 후원자이자 트리스탄 초연의 지휘자였던 한스 폰 뷜로의 아내인 코지마 폰 뷜로와 함께였다. 코지마는 프란츠 리스트와 유명한 백작 부인인 Marie d'Agoult 사이의 사생아로, 바그너보다 24살 연하였다. 리스트는 바그너와 친분이 있었지만, 그의 딸이 바그너를 보러 다니는 것을 금했다. 1865년 4월에, 그녀는 바그너의 사생아를 낳았고, 이름을 이졸데라고 지었다. 그들의 부주의한 애정 행각은 뮌헨에 추문으로 떠돌았고, 설상가상으로 바그너는 왕에 대한 영향력을 의심하던 뮌헨의 왕궁 일원 사이에서 선호 받지 못하는 인물이 되었다. 1865년 12월에, 루트비히는 결국 작곡가가 뮌헨을 떠나도록 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는 분명히 왕위를 버리고 그의 영웅을 따라 망명할 생각도 했었지만, 바그너가 재빨리 그를 말렸다. 루트비히는 바그너를 스위스의 루체른 호 인근의 빌라 Triebschen에 보냈다. 마이스터징거는 Triebschen에서 1867년 완성되었고, 다음 해 6월 21일에 뮌헨에서 초연되었다. 10월에, 코지마는 결국 한스 폰 뷜로를 설득해 그녀와 이혼하게 했다. 리하르트와 코지마는 1870년 8월 25일에 결혼했다. (리스트는 그의 새 장인에게 몇 년 간 보러 오라고 말하지도 않았다.) 그 해 크리스마스에, 바그너는 코지마의 생일 선물로 지크프리트 목가를 선사했다. 코지마와의 결혼은 바그너의 생애 마지막까지 지속되었다. 그들 사이에서 또 한 명의 딸인 에바와 아들인 지크프리트가 태어났다. Triebschen에서 1869년에 바그너는 처음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와 만났고, 곧 굳은 친구가 되었다. 바그너의 사상은 니체에게 주요한 영향을 주었고, 그 때 니체의 나이는 서른 한 살이었다. 니체의 첫 책인 "비극의 탄생"(Die Geburt der Tragödie, 1872)는 바그너에게 헌정되었다. 둘 사이의 관계는 니체가 점점 바그너의 다양한 측면의 생각, 가령 그의 평화주의와 반유대주의와 같은 것에 환상이 깨지면서 결국 멀어졌다. "바그너의 경우" (Der Fall Wagner, 1888)와 "니체 대 바그너" (Nietzsche Contra Wagner, 1889)에서, 그는 바그너를 퇴폐하고 타락한 것으로 비난했고, 심지어 그 자신의 이른 시절의 미숙한 시야에 대해서도 자기 비판했다.
바이로이트 바그너는 그의 새 가정에 안착하여, 그의 에너지를 반지 사이클을 완성하는 데로 돌렸다. 루트비히의 주장에 따라 사이클의 첫 두 작품인 라인의 황금과 발퀴레의 "특별 시사회"가 뮌헨에서 공연되었지만, 바그너는 완성된 사이클은 특별히 고안된 새 오페라 극장에서 공연되기를 원했다. 1871년에, 그는 작은 마을인 바이로이트를 그의 새 오페라 극장의 위치로 결정했다. 바그너 일가는 그 다음 해에 이주하였고, 바이로이트 축제극장의 초석이 놓였다. 공사를 위한 자금 조달을 위해, "바그너 협회"가 각 도시에 결성되었고, 바그너 자신도 독일 전역에 콘서트 여행을 시작했다. 하지만 결국 충분한 자금은 루트비히 왕이 또 다른 거액의 보조금을 1874년에 지원한 후에야 모였다. 그 후년에, 바그너 일가는 바이로이트에 리하르트가 반프리트(독일어로 "미혹과 광기로부터의 평화와 자유")라고 이름붙인 빌라를 그들의 영구적인 집으로 삼아 이주를 마쳤다. 축제극장은 결국 1876년 8월에 반지 사이클의 초연과 함께 문을 열었고, 그 때부터 계속 바이로이트 축제의 개최지로 남았다.
만년 1877년에 바그너는 그의 최후의 오페라인 파르지팔에 대한 작업을 시작했다. 작곡에는 4년이 걸렸으며, 그 동안에 그는 또한 일련의 종교와 예술에 대한 수필을 썼다. 바그너는 파르지팔을 1882년 1월에 완성했으며, 두 번째 바이로이트 축제가 이 새 오페라를 위해 열렸다. 바그너는 이때에 심하게 아팠으며, 점점 심한 협심증2)에 시달리게 되었다. 8월 29일, 열여섯 번째와 최종의 파르지팔 연주 동안에 그는 비밀리에 3장을 연주하고 있는 피트에 들어가, 지휘자 헤르만 레비로부터 지휘봉을 받아서 작품의 결론부에 이르기까지 공연을 지휘했다. 이 축제 이후에, 바그너 가족은 베니스로 겨울 여행을 떠났다. 1883년 2월 13일, 리하르트 바그너는 심장마비로 베니스 대운하 위의 Palazzo Vendramin에서 사망했다. 그의 시신은 바이로이트로 되돌아와 반프리트의 정원에 묻혔다.
바그너의 영향과 유산 바그너의 유렵 예술과 문화에 기여한 바는 부인할 수 없으며 기념비적이다. 그의 생전과 여러 년 후 동안, 바그너는 그의 다수의 팬들 사이에서 광적인 호응을 이끌어냈으며, 그들 사이에서 거의 신과 같은 지위를 가지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의 음악인 트리스탄과 이졸데는 특히 중요한 새 지평을 열었다. 이후 여러 해 동안 많은 작곡가들은 바그너 편에 서거나 바그너에 반대하는 편 중 하나에 설 수밖에 없었다. 안톤 브루크너와 휴고 볼프는 그에게 특히 많은 빚을 졌으며, 세자르 프랑크, 앙리 뒤팍, 에르네스트 쇼송, 쥘 마세네, 알렉산더 폰 쳄린스키, 한스 피츠너 등등의 수많은 음악가들 또한 그러하였다. 구스타프 말러는 "오직 베토벤과 바그너만이 있었다"고 말했다. 클로드 드뷔시와 아르놀트 쉔베르크의 이십 세기 화성 혁명은 트리스탄으로부터 그 근원을 찾을 수 있다. 처음으로 어떤 종류의 드라마적인 공연 동안에 불빛을 희미하게 해야 한다고 처음 요구했던 사람이 바그너였으며, 처음으로 관현악단 피트(바이로이트에서는 관중석과 완전히 차단되어 있다)를 바이로이트 극장에서 사용했던 것도 그였다. 바그너는 그의 작품이 청중들의 상상 속에서 경험될 수 있는 "보이지 않는 극장"을 꿈꿨다. 오디오 기기의 발달로 이 꿈은 현실이 되었다. 바그너의 문학과 철학에 대한 영향 또한 분명하다. 영향력 있는 저작물인 비극의 탄생의 저자인 프리드리히 니체는 처음에 바그너를 숭배했는데, 그의 음악에서 유럽 정신이 다시 젊어지는 가능성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니체는 파르지팔 이후에 바그너와 결별하였으며, 그 작품을 기독교 신앙심에 영합하는 표현으로 보았기 때문이었다. 이십세기에, W. H. 오든은 한때 바그너를 "아마도 모든 사람들 가운데 가장 위대했던 천재"로 불렀으며, 제임스 조이스, 토마스 만, 그리고 마르첼 프로스트도 바그너에게 크게 영향을 받아 그들의 소설에서 바그너를 논했다. 바그너는 T. S. 엘리엇의 황무지의 주요 주제 중 하나이며, 그의 오페라에서 많은 부분을 인용하고 있다. 스테판 말라르메, Paul Verlaine, 그리고 사를 보들레르는 그를 숭배했다. 사랑과 죽음(즉 에로스와 탄토스)의 관계에 대한 것 등 그의 음악 속의 많은 발상은, 지그문트 프로이트에 의한 정신 분석을 예고했다. 바그너의 영향이 꼭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한 때, 독일의 음악적 삶은 바그너 지지자와 요하네스 브람스 지지자의 두 부분으로 나뉘었다. 후자의 경우에는 강력한 비평가인 에두아르트 한슬릭의 도움을 받고 있었는데, 그는 전통적인 형태를 최고로 인정하고 바그너식의 혁신에 반대하는 보수파를 이끌었다. 드뷔시 같은 인물도 그를 반대했지만 ("그 오래된 중독자"), 바그너의 영향을 부인할 수는 없었다. 사실 드뷔시는 그의 영향이 의심할 여지가 없으며 압도적이었기 때문에 바그너와 결별할 필요가 있었던 많은 작곡가들 중에 한 명이었다. 바그너의 음악은 강한 반응을 계속 일으켰다. 그의 후기작에서, 그는 바그너 작품의 그것처럼 긴 시간과 깊은 맥박을 만들어내어 음악을 완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청자들이 바그너의 시간 개념에 완전히 익숙해지기를 요구하는 그런 음악을 만들어 냈다. 로시니("바그너는 굉장한 순간과 진절머리 나는 15분을 가지고 있다")를 포함해 많은 저항이 있었지만, 그 자신의 "Guillaume Tell"이 네 시간 이상의, 어떤 바그너 작품 하나보다도 긴 시간을 요구했다. 바그너의 이상은, 지크프리트의 "금발의 괴물" 영웅주의로부터, 그의 열성적인 쇼펜하우어 오독과 더불어 죽음과 신격화에 대한 매혹에 이르기까지, 이제는 심하게 유행에 뒤떨어져 있다. 그러나 여전히 그의 오페라는 계속 강한 추종을 불러일으키고 있으며, 바그너는 나폴레옹의 뒤를 이어 두 번째로 그에게 자극받은 이차 문학의 양이 많은 역사적 인물로 꼽히고 있다. 그렇게 그는 계속적으로 많은 찬반 논란과 존경을 동시에 자극하고 있다. 그 원인이 그의 음악의 뿌리에 있는 능가할 자 없는 숭고함, 힘, 장엄함, 그리고 때때로 위험한 초월적인 아름다움 때문이고 말이다. 1) [丹毒, erysipelas] : 연쇄구균에 의한 피부 및 피하 조직의 질환.
http://kr.wikipedia.org/wiki/Richard_Wagner |
| 바그너의 경우 (Der Fall Wagner.) - Ein Musikanten-Problem.
Von Friedrich Nietzsche.
서문 나의 가장 큰 체험은 병의 치유였다. 바그너는 내가 가졌던 병증들 중의 하나에 불과할 뿐이었다. 내가 바그너라는 병에 감사하고 싶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이 글에서 바그너가 해롭다고 주장하면서도 나는 그가 누구에게 필요 불가결한지에 대해서도 주장하고 한다.―그가 철학자에게 필요불가결하다는 것을. (중략) 현대 영혼의 미궁의 내막에 대해 바그너보다 더 정통한 인도자를, 바그너보다 더 유창한 영혼의 고지자를 어디서 발견하겠는가? 현대성은 바그너를 통해서 자신 안에 있는 가장 내밀한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 현대성은 자신의 선한 면도 숨기지 않고, 악한 면도 숨기지 않는다. 현대성은 자신을 부끄러워하는 것을 잊어버렸다. 그리고 역으로 : 바그너에게서 선과 악의 결과가 어떠할지가 명백히 알려지면, 현대의 가치에 대한 계산이 거의 끝나버린 셈이 된다.―오늘날 한 음악가가 “나는 바그너를 증오하지만 여타의 음악은 더 이상 참아낼 수 없다”라고 말한다면, 나는 이 말을 완전히 이해한다. 그러나 나는 다음처럼 말하는 어떤 철학자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 “바그너는 현대성을 요약하고 있다. 별다른 도리가 없다. 일단은 바그너주의자가 되어야한 한다……”
-> 모너니티의 선구자이자 이 시대의 아들, 즉 한 사람의 데카당1)이다.
바그너의 경우 (1888년 5월 토리노에서의 편지) - 웃으면서 진지한 사항을 말한다.
바그너의 오케스트라에 대해서 바그너의 오케스트라 음색은 난폭하고 인위적이며 그러면서도 ‘순수’해서. 현대 영혼의 세 감각에 대고 한꺼번에 말을 해댑니다.― 이러한 바그너의 오케스트라 음색은 내게 얼마나 해를 끼치는지요! 나는 그것을 북아프리카에서 지중해 연안으로 불어대는 열풍인 시로코Scirocco라고 부릅니다.
사랑에 대해서 그들은 사랑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바그너 역시 사랑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사랑을 이기적이지 않다고 믿었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다른 사람의 이익을 바라고 또 곧잘 자신의 이익에는 배치되는 것을 바라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그 대신에 그들은 다른 사람을 소유하기를 원합니다……신마저도 예외는 아닙니다. 신은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2) 라는 식으로 생각하는 것과는 거리가 멉니다─사람들이 그에게 사랑으로 응답하지 않으면 그는 무시무시해집니다. 사랑은─이 격언으로 신과 인간 사이에서 옳은 판단을 내릴 수 있습니다.─그 무엇보다도 가장 이기적인 감정이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상처받게 되면 가장 관대하지 못하다.(B. Constant.)
오페라에 대해서 그의 오페라는 구원의 오페라이며, 언제든 누군가가 그의 곁에서 구원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 때로는 어느 젊은 청년이, 때로는 어느 젊은 처자가 말입니다─이것이 바그너의 문제인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의 주도동기Leeitmotiv를 얼마나 다양하게 변화시키는지를! 바그너가 아니라면 누가 우리에게 가르쳐주겠습니까? 편애하는 순진한 처녀가 자기가 각별히 관심을 갖는 죄인을 구원한다는 것을(<탄호이저3)>의 경우), 또는 영원한 유대인도 결혼하면 정작하게 되어 구원받게 된다는 것을(<방랑하는 네델란드 사람>의 경우). 또는 낡고 찌든 여인의 방은 순결한 젊은이에게 구원받기를 선호한다는 것을(<쿤드리>의 경우). 또는 아름다운 소녀는 바그너주의자 기사에게 구원받는 것을 가장 좋아한다는 것을(<마이스터징어>의 경우) 또는 결혼한 여인 역시 기사에 의한 구원을 기꺼워한다는 것을(<이졸데>의 경우). 또는 ‘늙은 신’이 모든 면에서 도덕적인 타협을 하고 난 다음에 결국에는 자유정신과 비도덕주의자들에 의해 구원받는다는 것을(<반지>의 경우). (중략) 바그너의 발레는 사람들을 절망에 이르게 할 수 있다는 점을─그리고 덕에 이르게 할 수 있다는 점을!(또 한번 <탄호이저의 경우). 그것이 제시간에 잠자리에 들지 않아서 생기는 가장 나쁜 결과들 중 하나일 수 있다는 점을(다시 한번 <로엔그린>의 경우). 정말 누구와 결혼했는지를 결코 정확히 알아서는 안 된다는 점을(세 번째로 <로엔그린>의 경우)─<트리스탄과 이졸데>는 완벽한 남편을 찬양합니다. 그 남편은 어떤 경우라도 단 하나의 물음을 가질 뿐입니다 : “그런데 왜 당신은 미리 내게 말하지 않았는가? 그것이 제일 간단한 것인데!” 대답 : “나는 그것을 당신에게 말할 수 없어요 ; 그리고 당신이 물어보았을 그것을, 당신은 절대 경험할 수 없을 거에요.”
예술에 대해서 바그너는 노이로제 환자입니다.4) 여기서 예술과 예술가라는 번데기가 되어버린, 변질이라는 프로테우스적 속성보다 오늘날 더 잘 알려져 있는 것은 없으며, 더 잘되어 있는 연구도 없습니다. 우리의 의사들과 생리학자들은 자신들에게 가장 흥미로운 경우, 최소한 매우 완전한 질환의 경우를 바그너에게서 보고 있습니다. 신경 기관의 이런 미숙과 과민보다 더 현대적인 것은 없기 때문에, 바그너는 전형적인 현대 예술가이며 현대성의 칼리오스트로A. Cagliostro입니다. 그의 예술 안에는 오늘날 전 세계가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이 가장 유혹적인 방식으로 혼합되어 있습니다─지쳐있는 자들을 자극하는 잔인과 기교와 순진무구(바보스러움)라는 세 가지 중요한 자극제가 말이지요.
바그너 문학의 핵심에 대해서 교활의 학교입니다. 바그너가 연주해내는 처리 방식의 체계는 수백 가지 다른 경우들에도 적용됩니다─귀가 있으면 한번 들어보십시오. 그 세 가지 가장 귀중한 처리 방식을 명확하게 표현해준다면, 내가 사람들에게 감사를 요구해도 마땅하지 않을까 합니다.
바그너가 할 수 없는 모든 것은 비난받아 마땅하다. 바그너는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을 것이다 : 그러나 그가 원하지 않는다─원칙의 엄격성 때문에 바그너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은 어느 누구도 흉내 내지 않을 것이고, 어느 누구도 먼저 해내지 않았으며, 어느 누구도 흉내 내서는 안된다…… 바그너는 신적이다……
이 세 명제들은 바그너 문학의 핵심입니다 : 나머지는─그냥 ‘문학’이지요. (중략) 달리 말하면, 사람들이 그 음악을 꽤 어려워하지 않고서도 이해한다는 것이 이유가 될까요?─실제로 그는 평생 하나의 명제만 되풀이해왔습니다 : 자기 음악이 단지 음악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고 말이지요! 음악 이상을 의미한다고!……“단지 음악만이 아니다”─어떤 음악가도 이렇게는 말하지 않습니다. 다시 한번 말하자면 바그너는 전체를 창작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니 그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으며, 불완전한 것을 만들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모티브’, 몸동작, 정식, 이중으로 늘리고 백 배로 늘임. 음악가로서 그는 수사학자였습니다─그래서 그는 원칙적으로 ‘그것의 의미는’이라는 것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입니다. “음악은 언제나 수단일 뿐이다” : 이것이 그가 내세웠던 이론이었으며, 무엇보다도 그가 통틀어 실천할 수 있었던 유일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떤 음악가로 이런 식으로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바그너는 자기 음악이 “무한한 것을 의미하므로” 진지하게 받아들이라고, 깊이 있게 받아들이라고 전 세계를 설득시키기 위해 문학을 필요로 했던 거지요 : 그는 평생 ‘이념’의 해설가였습니다.
니체의 요구에 대해서 (상략) 예술에 대한 나의 분노와 우려와 사랑이 이번에 나에게 말하도록 했던 그 세 가지 요구들을 말입니다. 극장은 예술을 지배하는 주인이 되지 않는다는 것. 배우는 진정한 예술가를 현혹하는 자가 되지 않는다는 것. 음악은 기만하는 예술이 되지 않는다는 것. 프리드리히 니체.
추신 바그너 추종자들은 비싼 대가를 치르고 있습니다. 나는 오랫동안 바그너라는 전염균에 방치되어 있던 젊은이들을 관찰했습니다. 그 첫 번째의 비교적 악의 없는 효과는 취향의 <부패>입니다. 바그너는 알코올을 지속적으로 사용하는 것 같은 효과를 냅니다. 무감각하게 만들고, 위에는 점액이 차게 합니다. 특별한 효과는 : 리듬 감각의 퇴화입니다. 내가 그리스식 상투어로 “늪을 움직인다”라고 불렀던 것을 바그너주의자는 끝내 리드미컬하다고 일컬어버렸습니다. 정말 훨씬 더 위험한 것은 개념의 타락입니다. 젊은이는 천치가 되어버립니다─ ‘이상주의자’가 되어버립니다. 그는 학문을 넘어서 있습니다 : 이 점에서 그는 거장의 높이에 있기는 합니다. 그런데 반면 그는 철학자 흉내를 냅니다 : 그는 학문을 넘어서 있습니다 : 이 점에서 그는 거장의 높이에 있기는 합니다. (중략) 아아, 이 늙은 미노타우로스! 그가 우리에게 무엇을 잃어버리게 했던가! 매년 사람들은 가장 아름다운 처녀들과 청년들의 행렬을 그의 미궁 속으로 이끌어갑니다. (후략) 1) 데카당(Decadent)/ (영)Decadent : 19세기말의 일군의 시인들을 일컫는 말로 특히 프랑스의 상징주의 시인과 그와 비슷한 시기의 영국 심미주의 운동의 후세대에 속하는 시인들을 말한다. 이 두 집단은 문학과 예술을 산업사회의 물질만능주의로부터 해방시키고자 했으며, 일부는 도덕에서도 자유분방함을 추구했기 때문에 '데카당'의 의미가 확대되어 '세기말'(世紀末)과 거의 같은 뜻으로 쓰이게 되었다. 데카당이라는 용어는 원래 프랑스의 가브리엘 비케르와 앙리 보클레르가 쓴 풍자시집 〈아도레 플루페트의 퇴폐 Les Deliquescences d'Adore Floupette〉(1885)에 나오는 말인데, '퇴폐적'이라는 뜻의 이 형용사를 폴 베를렌이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아나톨 바쥐가 창간한 평론지 〈데카당 Le Decadent〉은 1886~89년 간행되었고, 폴 베를렌도 그 잡지의 기고자였다. 데카당파는 1867년에 죽은 샤를 보들레르가 그들에게 영감을 주었다고 주장했으며, 아르튀르 랭보, 스테판 말라르메, 트리스탕 코르비에르도 그 일원으로 꼽았다. 이밖에 중요한 인물은 종교적 신비에 관심이 많은 소설가 J. K. 위스망스가 있었는데, 그가 쓴 〈 역로 A rebours〉(1884)라는 소설을 영국의 아서 사이먼스('금발의 천사'로 불림)는 '데카당파의 기도서'라고 불렀다. 영국의 데카당파는 1890년대에 라이머스 클럽회원이거나 〈옐로 북 The Yellow Book〉의 기고자인 아서 사이먼스, 오스카 와일드, 어니스트 다우슨, 라이어넬 존슨 등이다. G.L. 반 로제브루크가 쓴 〈데카당파의 전설 The Legend of the Decadents〉(1927)에는 '데카당'이라는 용어의 해설이 나온다. (출처 : 브리태니커백과사전) 2) Goethe, Wilhelm Meister, Lehrjhre Ⅳ. 9 : Dichtung und Wahrheit Ⅲ. 14 비교 3) 참고자료 1 4) Journal des Goncourt Ⅱ, 279쪽의 “Et l mot 여 docteur de Tours : Le génie est une névrose"와 비교. 니체는 이 시기에 이 책을 읽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