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rial Experiment : 일단은 잡다한 글부터, 여유가 되면 실험적인 글을 쓸 예정입니다.
Guestbook
Catergories
Recent Articles
Recent Comments
Recent Trackbacks
Calendar
Tag
Archive
Link
Search
 
해당되는 게시물 1건
  그녀의 매혹 #2 
작성일시 : 2006/11/01 09:48 | 분류 : Novel | 태그 :

그녀의 매혹 #2

고양이가 스쳐 지나간다. 자동차 밑에서 겁에 질린 눈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다.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펴본다. 회색 건물이 줄줄이 늘어 서 있고, 길게 깔린 아스팔트가 놓여있다. 뒤를 돌아봤다. 마찬가지의 풍경. 앞이나 뒤 어디를 보아도 똑같은 풍경만 이어지고 있다.

나는 어디로 가고 있던 중이었던가.

머리가 지근거리며 아파왔다. 손가락으로 지그시 누르며 두통이 가시기를 기다렸다. 우선 여기가 어딘지를 알아야 한다. 집을 나온 것은 어렴풋이 기억이 난다. 집을 나와서 어디론가 가기 위해 걸어가고 있었다. 지금 내가 있는 곳은 집과 가려고 하는 장소 사이겠지. 주위를 둘러보아도 특별한 표지판 같은 건 없다. 낯선 풍경. 마치 하늘에서 이 자리로 떨어져서 어디에서도 오지 않았고 어디로도 가고 있지 않은 이방인 같다.

“오래 기다렸지?”

소녀는 환한 미소로 말한다. ‘차가 막히는 바람에…, 미안해!’ 라고 덧붙이며 두 손을 모아 연거푸 고개를 숙인다. 눈을 감았다가 다시 뜨고 앞을 바라보았다. 아무도 없다. 소녀는 잔영을 남기지 않고 사라져 버렸다.

나는 길을 걸어갔다. 멀리 보이는 광장까지, 거기가 내가 도달할 장소라고 생각하면서 걸었다. 광장에 도착하고 나서는 치솟아 오르는 물기둥을 쳐다보며 누군가를 기다렸다. 누구를 만나야 하는지 아직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환한 미소를 짓는 소녀의 이미지가 스쳐지나간다.

연인…일까.

생각했다. 물방울이 하얗게 퍼져 대기로 녹아들어가는 아름다운 모습을 바라보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누군가를 기다리며 서 있다. 나는 그들 중에 하나지만 기대에 찬 표정을 짓고 있는 그들 혹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더 초조해지는 그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메말라 있었다. 그렇다. 그들은 감정이 풍부했다. 나는 그저 여기까지 걸어왔고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을 언제 올지도 모르는 사람을 기다리고 있다. 내가 거기에 있어야 하기 때문에 있어야 한다는 기분으로, 당연하게 해야 하는 일을 한다는 기분으로 서 있었다.

나는 느긋한 마음으로 주변을 꼼꼼히 관찰했다. 각자의 이유로, 각자의 기대를 품고 그들은 서 있다. 나와 같은 이유로 여기에 서 있는 사람은 없어 보이지만, 그 외의 이유라면 뭐든 만들어서 이름 붙이기만 한다면 가능할 것 같았다.

휴대폰이 울리고 있다.

주머니에서 퍼지는 익숙한 벨소리를 들으며 휴대폰을 꺼내어 쥔다. 낯설면서도 애타게 기다렸다는 생각이 드는 이름이 휴대폰 액정에서 반짝이고 있다. 받아야 하나, 받지 말아야 하나. 초조해진 마음에 주변을 둘러보았다. 간절히 도움을 바라는 마음으로 대상을 찾았다. 하지만 누구 하나 나를 도와줄만한 사람은 없었다. 그게 아니지. 누구도 도와줄 수 없으니까 없는 거다. 마음속으로는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애타게 누군가를 찾아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벨소리가 열다섯 번, 열여섯 번 점차 그 숫자를 더해간다. 스물 번이 넘으면 그녀는 전화를 끊을 것이다. ‘전화를 받아!’ 라고 생각하면서도 손은 움직이지 않았다. 통화 버튼을 누르기만 하면 그녀와 나 사이에 얇은 선이 이어진다. 목소리만 주고받을 수 있는 그런 얇은 선이….

스물 번째 벨소리가 울린다. 반사적으로 나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낯익은 그녀의 목소리가 휴대폰에서 흘러나온다. 잔뜩 긴장해버리는 바람에 온 몸에 땀이 흐르는 게 느껴졌다. 피부에 옷이 축축하게 달라붙는다.

“응. 나야.”

심호흡을 크게 하고 휴대폰을 귓가에 대었다.

“미안해. 만나서 이야기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도저히 갈 수가 없었어. 그러니까 정말 미안하지만, 전화로 이야기할게. 괜찮아?”

“괜찮고 말고 할 게 어디 있어. 오늘이 힘들면 내일, 내일이 힘들면 그 후에 네가 괜찮을 때 만나면 되는걸. 신경쓰지마.”

“…….”

“무슨… 일이야?”

떨리는 목소리로 그녀에게 물었다. 한참동안 말을 잇지 못하던 그녀가 옆에 있는 누군가와 뭔가를 이야기하더니 뭐가 우스운 건지 몰라도 피식하며 웃었다.

“말해야 한다고 계속 생각했어. 아니, 말 보다는 직접 보여주는 게 더 낫지 않을까 생각해서 계속 미루어 두고 있었지. 그렇지만 말이지.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그냥 말만 하면 될 것 같아.”

“그러니까,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야? 오늘 나올 수 없다고 말하려고 했지만 나올 수 없어 미안하다면 그걸로 괜찮아. 바쁘다는걸 어떻게 하냐. 그래, 어쨌든 오늘은 못 만나는 거지?”

그녀는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고 있는 듯 드문드문 이빨 사이로 새어나오는 바람소리가 귀에 거슬렸다. 나는 도저히 가만히 기다릴 수가 없었다. 어서 전화를 끊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미안하지만, 우리에게 내일은 없어.”

“그게 무슨 말이야? 내일이 없다니.”

“우리에게는 더 이상 내일이 없다는 거야.”

“그러니까 그게 무슨 말이야?”

“정말 넌 바보구나. 그런 것도 이해 못하고. 내가 너에게 미안해 할 필요도 없겠다.”

“무슨 병이라도 걸린 거야?”

그녀는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어쩜 그렇게 착하니, 넌. 그게 네 매력이긴 하지만, 그만큼 쓸모없기도 해.”

응어리 같은 답답한 무언가가 마음 한 구석에서 반복해서 외치고 있다. 그녀는 분명히, 분명히…. 그래 눈치 채고 있긴 했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머리로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마음으로는 분명히 이해하고 있었다.

“나 새로운 사람이 생겼다. 그는 나와 잘 어울린다고 생각해. 너와는 달라. 강하고 나를 잘 이끌어 줘. 만나 때마다 강렬한 추억만을 선사해줘. 우리의 만남? 웃음도 안 나와. 난 어째서 우리가 만나야 하는 건지, 시간 낭비라고만 생각했어. 그 생각이 지금의 그와 만나면서 더 확실하고 선명하게 떠올랐어. 그러니까 우리들 더 이상 만나지 말자. 정말로 미안한 말이지만, 나는 너와 사귀었다는 사실이 창피하니까, 정말 창피해서 열 받아.”

짧게 숨을 몰아쉬면서 그녀는 마저 말을 이었다.

“앞으로 길에서 만나도 아는 척하지 말자.”

단숨에 숨을 내뱉듯이 나를 향해 거친 말들을 퍼부었다. 처음이었다. 그녀가 나에 대해 말을 한 것은.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그렇게 말을 한다면 그게 사실일거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항상 옳고 나는 항상 그르다. 분한 마음도 있지만, 그녀가 하는 말은 하나하나 따져보지 않아도 정확한 판단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그런 인간일 뿐일 테니까, 그녀가 말하는 그런 사람에 불과할 뿐일 테니까 말이다. 그래 그럴 거다.

“그리고…, 아니다. 더 이상 무슨 할 말이 있겠냐. 그만하자.”

단지 하나, 단지 하나의 의문이 가슴 속을 파고들었다.

“언제부터, 언제부터였어? 그와 만나기 시작했던 것이.”

 그녀는 나를 비웃었다. 피식하는 비웃음 소리가 또 들렸다.

“알 필요 없지 않아? 설령 너와 만나기 시작했을 때부터라고 해도 그게 무슨 의미가 있어?”

“…….”

“잘 지내길 바래. 안녕.”

그녀가 전화를 끊었다. 귓가에 그녀의 마지막 말과 전화가 끊긴 소리만이 울려 퍼진다. 나는 울고 있다. 눈물이 방울져서 눈에서 흘러내린다. 분수대를 바라보며 흐르는 저 물줄기가 내 눈물을 감추어 주기를 바라고 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울고 나면 괜찮아 질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처음부터, 모든 것이 처음부터 잘못 되고 있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나는 그런 내 불안을 숨기기 위해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은 척하고 싶었다. 오늘이 지나가고 내일이 지나가면, 아무런 일 없이 지나가버리면 그녀와 나는 여전히 연인 관계로 남아 세상을 살아가고 있겠지. 그렇지만 그저 편한 대로만 생각하고 행동하며 살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오늘은 그녀의 생일날이다.

주머니에 든 티켓을 꺼냈다. 오늘 그녀와 함께 보고 싶었던 콘서트. 그녀가 몇 개월 전부터 보고 싶다고 말했던 것으로 당시 전부 매진되어 버려서 매우 안타까워했었다. 그래서 나는 그녀를 기쁘게 해주기 위해 간신히 티켓을 구하고 오늘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에게 영화를 보러가자고 약속을 잡은 다음 시간에 맞춰 나왔을 때 티켓을 보여주려고 했다. 티켓을 받아든 그녀는 눈에 띄게 웃으며 도대체 어디에서 이걸 구했냐고, 나를 두고 대단하다고 하며 마지막에는 사랑한다고 말하리라. 그리곤 그녀의 생일을 위해 준비한 케이크를 먹으며 환상적인 데이트가 펼쳐질 거라고 상상했다.

‘찢어버리자. 이제 필요 없어.’

티켓을 꽉 쥔 후 힘을 줘서 찢으려는 순간 차가운 무언가가 손에 닿았다.

“아깝지 않아요?”

환청과도 같은 말이 들렸다. 몇 초간의 침묵이 흘렀다.

“아깝지 않으세요?”

가벼우면서 높은 음색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정신을 차리고 티켓을 쥔 손을 쳐다보니 거기에는 검은 매니큐어로 손톱을 칠한 길고 가는 손가락이 있었다.

“찢어버리면 천벌을 받을 거예요. 아니지, 그 표를 구하려고 했던 사람들을 모욕하는 꼴이 된단 말이에요.”

분명 아직 성인이 되지 않은 앳된 소녀의 목소리이다.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상상대로 거기에는 소녀가 있었다. 아니, 소녀라고 부르기에는 적당하지 않을지 모르겠다. 어쨌든 굉장한 모습을 한 소녀가 서 있다.

소녀는 흰 셔츠와 검은 스커트가 대조되는 옷차림이다. 금색 선이 질서정연하게 그어져 있고 주름이 곳곳에 잡혀 왠지 비싸 보이는 셔츠는 ‘고풍스럽다.’라고 표현할 수 있을 정도였다. 검은 스커트는 레이스가 여러 줄로 쌓여 있어서 접근하기 힘든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마치 비주얼 계열의 인형이 그대로 인간으로 태어나서 거리를 거닐고 다니는 듯 했다. 그러니까 내가 소녀를 보고 느낀 감정은, 스크린 너머로만 보았던 배우가 우연히 눈앞에 나타나서 어쩔 줄 몰라서 당황스러워하는 느낌과 비슷하다. 그런 당혹스러운 감정은 자연스럽게 소녀가 아름다거나 추하거나 그리고 평범하거나 어떤 부류라고 해도 눈에 비친 첫 모습만으로도 주눅이 들 정도라고 할 수 있겠다. 어쨌든 그런 소녀의 대담한 모습에 전기가 파짓하고 순간적으로 흘러 온 몸이 감전 된 것처럼 부르르 떨렸다.

그 뿐만이 아니라, 소녀의 몸 곳곳에 있는 많은 액세서리가 그 자신을 뽐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액세서리는 단연코 코부터 오른손목의 은팔찌까지 이어져 있는 얇은 사슬이다. 이음새가 촘촘하고 곡선을 그리듯 이어져 있다. 손이 움직이는 범위까지 예상을 했는지 적당한 정도의 폭을 유지하고 있었다. 코에는 피어싱을 한 부분에 조그마한 갈고리 모양의 끝에 사슬을 걸었다. 아마도 은팔찌와 쇠사슬이 하나의 세트고 코의 피어 싱은 옵션이리라. 그 외에도 언뜻 보기에 새의 형상 같은 은색 펜던트가 은색 줄에 매달려 목에 걸려 있었고, 오른손목에 있는 은팔찌를 제외하고 가죽, 천 등 여러 가지 재료로 만들어진 팔찌가 겹겹이 손목에 끼워져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예쁘고 앙증맞은 작은 보석들이 모여 다이아몬드 형태를 만들고 있는 귀걸이가 귓불에 매달려 있었다. 물론 귓불의 반대편, 즉 귀의 제일 위쪽에는 은색 피어싱이 당연하다는 듯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저 정도 착용하고 나면 손의 무게보다도 장신구의 무게가 더 나갈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너무 오랫동안 빛을 바라보고 있어 눈이 아파진 것처럼 잠시 고개를 돌렸다.

하늘 높은 곳에서는 밤이 오기 전이라 노을이 져서 어둑어둑해지려고 하고 있었다.

다시 고개를 돌려 소녀를 쳐다보았다. 이전보다 조금 더 주의 깊게 소녀를 쳐다보았다. 소녀는 그물 스타킹에 무릎까지 올라오는 가죽 부츠를 신고 있었다. 검은 스커트와 부츠 사이에 드러난 매끄러운 피부가 검은 격자무늬로 감싸져서 어려보임에도 불구하고 온몸에 색기가 흘러 넘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