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rial Experiment : 일단은 잡다한 글부터, 여유가 되면 실험적인 글을 쓸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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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anguage Processing : Humans and Computer 
작성일시 : 2006/11/10 07:20 | 분류 : Report | 태그 : , , ,

응용영어 수업의 두번째 레포트

첫번째 레포트에 비해서는 그나마 쉬웠다. 의견을 물어보는 게 많았으니까, 가볍게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면 되었다. 그 뿐만이 아니라, 단어 의미 차이 등은 단어를 폭 넓게 이해하는 데에 도움을 주었다.

과연 컴퓨터는 인간의 언어를 배울 수 있을까. 내 옆에서 장난 치고 있는 고양이가 인간의 언어를 배울 수 있을까. 그럴 수만 있다면, 제발 키보드를 치는 나의 손을 건들지 말아 달라고 부탁하고 싶구나.

항상, 레포트로 시작하는 즐거운 새벽. 오늘도 이렇게 하루가 시작된다.


  인간은 죽지 못해 살아가는가. - 안락사에 대해 반대 의견 
작성일시 : 2006/05/11 02:08 | 분류 : Report | 태그 : , ,

 

인간은 죽지 못해 살아가는가.


인간이 어디에서 왔는지에 대해 대답할 수 있는가. “나는 어디에서 왔으며 어떻게 살아서 앞으로 어디로 갈 것이다.”라고 대답할 수 있는 자야 말로 진정 완전한 인간이 아닌가 생각한다. 자신의 존재를 탐구하여 그 답을 이끌어 낼 수 있다면 완전하게 된다는 의미가 아닌가. 하지만 인간은 완전하지 않다. 인간은 불완전성을 포함하고 있으며 따라서 그의 이성과 감성은 불완전성에 따라 움직인다. 이성의 면에서 보면, 지금 당장은 이성에 맞을지라도 절대적인 의미에서는 맞지는 않다. 상황을 바꾸어서 고려하면 이성은 다른 답을 내놓게 된다. 감성의 면에서는 어떤가. 감성은 “인간이 통제”할 수 있지 않다. 어째서 인간은 슬퍼야 하며 기뻐야 하는가. 이에 대한 물음에 충족할 수 있는가. 따라서 인간은 불완정성에 따라 이성과 감성도 그와 같이 행동한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인간은 어째서 살아가고 있는가. 어디에서 왔는지도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존재이다. 거기에 어떠한 것도 완전하게 해낼 수 없는 선천적 결함을 지니고 있다. 인간 존재에 대한 근원에서부터 시작해야만 인간의 생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게 된다. 인간은 태어나서 시간이 지나면서 그만큼의 나이를 먹는다. 우리의 나이 스물도 그만큼의 시간이 체내에 쌓이며 축척되고 있다. 즉, 인간은 생존 그 자체만으로도 시간을 자양분 삼아 역사를 자신의 몸 안에 기록하고 있다는 것이다. 인간 존재 그 자체만으로 우리는 시간을 받아들이고 인간의 감각을 통해 기록을 받아들인다. 인간의 감각이란 오감을 의미하고 기록이란 오감을 거쳐 들어오는 여러 정보를 의미한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그러면 오감이 아니라 사감은 어떤가, 오감이 아니라 삼감은 어떤가, 오감이 아니라 이감은 어떠하며 설령 오감이 아니라 일감인들 어떠하겠는가. 인간은 자신의 몸속에 과거라는 이름의 기억을 새기고 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오감은 아무런 의미를 가질 수 없다. 오감의 영역을 벗어나는 육감 즉, 인간의 정신이 인간이 인간으로 있도록 하는 일을 하는 것이다. 오감은 마지막 감각인 육감에 종속되어 있다. 생각의 끝에 닿는 것이 결국엔 육감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정신을 지녔다는 것만으로도 인간으로써 존재할 수 있다.

히포크라테스의 선서에서 의사는 자신의 의술을 펼쳐 환자를 대하겠다고 한다. 의사의 기본적인 의무는 의술을 펼쳐 사람을 치료한다는 것이다. 이는 인간의 오감에 속하는 상처이며, 상처를 치유함으로써 환자가 과거라는 이름을 새기기 쉽도록 유도한다. 하지만 위에서 말했다시피 오감은 아무런 의미가 없고 결국엔 인간의 정신이 더 중요하다. 아무리 의사라고 할지라도 인간 개개인의 정신 영역까지 고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정신 영역에 간섭하기 위해서는 기술이 아니라 그렇게 하고자 하는 의지이다. 그 의지란 아무데서나 쉽게 나오지 않는다. 인간은 가장 최고의 가치를 찾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모습인 자아에 도달하게 된다.

「Summer Snow」의 내용 중에 이런 말이 있다. “당신이 아무리 그녀의 고통을 이해한다고 해도, 그건 그녀가 느끼는 고통의 일부분도 안 되는 겁니다. 어떻게 당신은 그녀의 고통을 전부 이해했다고 말하면서 그렇게 웃고 있는 겁니까.” 그리고 「1리터의 눈물」에서 아야가 반 친구들에게 “이렇게 웃으며 이야기할 수 있도록 지금까지 1리터 정도의 눈물을 흘려야 했어. (전략) 격려 해주는 너희들에게 내가 가장 원했던 건, 한 번이라도 가지 말라고 나를 잡아주길 바랬던 거야.”라고 말하는 부분이 있다. 물론 우리가 보는 영상은 실제 있었던 일이 아니라 극화하여 만들어 둔 내용이다. 당사자가 아닌 이상 불완전한 이성으로써 어찌 이해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 생은 직접 겪어보지 않으면 알지 못한다.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인간의 한계로써 이해한다는 것 자체가 알지 못하는 범주에 들어간다는 의미다. 그러니까 인간의 정신을 인위적인 힘으로 파괴한다는 것은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다. 수백 가지의 통계자료나 수천 가지의 예시 그리고 수만 번의 동의가 있더라도 생을 결정하는 행위는 인간의 정신에 맡겨야만 한다. 그리고 인간의 정신은 이성이나 감정으로 사유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몸에 시간을 축적하여 추억으로 만드는 과정과는 반대로 자신의 몸에서 추억을 벗겨내는 과정을 통해서 생의 의미를 찾아낼 수 있다.

인간은 죽기 위해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다. 인간은 살기 위해 세상에 태어났고 이로써 살아가고 있다. 생이 있음과 없음은 이런 차이가 있는 것이다. 살고자 하는 목표를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자신의 몸에 새기기 시작하고 이는 인간의 본능으로 직결된다. 몸이 기억하고 있는 본능이란 개념적으로는 인간의 정신과는 다르다. 하지만, 생에 대한 갈구는 하고 있다. 왜냐하면 본능의 자양분은 인간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있음과 없음의 차이이다. 살고자 하는 인간의 본능적 의지는 인간 정신의 기본 발안― ‘있음’이다. 반대로 이성과 감성에 따라 그 자신의 의지를 속이는 것― ‘없음’이다. 그러므로 ‘있음’의 상징인 본능적 의지를 따른다. 인간의 생이 이러할지 인데 어떻게 인간 그 자신의 생을 포기하고자 할 수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