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후기구조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中 6장
교수님이 나누어 주신 것은 마단 사럽 교수의 「후기구조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책, 6장의 내용입니다. 그는 런던 사우스뱅크의 대학 교수인데, 후기구조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 이론에 대해 알기 쉽게 설명한 개론서입니다. 특히, 모더니티, 포스트모더니티, 모더니즘, 포스트모더니즘과 같은 용어의 개념과 정의를 분명하게 제시하면서 여러 사상가와 이론가들의 주요 논점을 간결하게 요약하고 있는 점을 눈여겨보면 됩니다. 그 중에서 6장의 경우 니체 사상에 근거한 후기구조주의자인 리오타르를 중심으로 포스트모더니즘을 해석하고 있습니다. 리오타르의 책, 「포스트모던의 조건」에서 모던 시대를 정당화하는 신화들(거대서사들), 과학을 통한 인류의 진보적 해방, 그리고 철학이 지식에 대한 통합성을 복원하고 인간성에 대해 보편적으로 유효한 지식을 발전시킬 수 있다는 생각을 반박합니다. 또한 더 이상 이성이라고 하는 총체 화된 관념에 대해 말할 수 없다고 믿는데, 이는 단수형의 이성이 존재하지 않고 오직 복수형의 이성들만이 존재한다고 비트겐슈타인의 언어게임 개념을 들어 주장하고 있습니다. 제가 설명할 부분이 바로 이 것입니다. 리오타르는 지난 40년간 주요 과학기술의 발전 때문에 우리가 익히 알고 있던 지식의 본성이 바뀌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합니다. 즉, 앞으로의 지식은 컴퓨터의 언어로 전환 되어 생산의 동력으로써 작용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비트겐슈타인의 언어게임 개념을 적용하여, 언어게임의 규칙이 언어게임 스스로를 정당화하는 것이 아니며, 선수들의 명시적 혹은 묵시적 계약에서 생기는 것이므로 규칙이 없다면 게임도 없다는 말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여러 가지 언어게임 안에서 전쟁의 은유를 사용하여 말하며 투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과학을 통해서는 인류가 진보적 해방을 할 수 없다고 말하는 리오타르는 지식의 종류로 서사적 지식과 과학적 지식으로 나눕니다. 서사적 지식이란 사회제도에 정당성을 부여해주는 것으로 이미 그러하다고 배운 것들을 의미합니다. 이 지식을 통해서 전달되는 것은 사회적 유대를 구성하는 일련의 규칙들입니다. 반대로 과학적 지식이란 우리가 선생님을 통해서 배우는 것들로써 이미 받아들여진 모든 진술에 대해 언제나 도전할 수 있는 명제를 의미합니다. 이 두 가지 지식의 주된 차이점은 과학적 지식이 언어게임의 일종인 외연만 남기고 그 밖의 모든 것은 배제할 것을 요구한다는 점입니다. 또한 서사적 지식의 존재나 타당성을 과학적 지식에 근거해서 판단할 수 없으며,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왜냐하면 서로 지식으로써 적용되는 범주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리오타르는 과학적 지식은 서사적 지식에 의지하지 않고는 진실한 지식인지 알 수도, 알릴 수도 없다고 주장합니다. 서사적 지식이 과학적 지식의 관점에서는 전혀 지식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과학적인 것은 서사적인 것을 바탕으로 해서만 존립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으로 리오타르는 스탈린주의가 메타서사를 인용하기만 했기에 의미가 없으며, 진정한 사회주의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에게 소외와 억압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하는 과학을 근거로 해야만 성립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리오타르는 이러한 거대서사들이 현대 사회에서 기능하지 못하는데, 이는 그러한 서사들이 단지 수단으로만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비슷한 맥락에서, 리오타르는 현대사회에서 과학은 자본으로 순환되면서 최적 수행의 원칙을 따르기 위한 증거를 산출해내는 데 그 의의가 있다고 말합니다. 즉, 부, 효율성, 진리 사이에 등식이 성립하며 이러한 결과로써 지식은 상업화되어 가고 있다고 말합니다. 이전까지의 과학이 진리를 산출하기 위한 것이었다면, 이제는 최적 수행을 위한 것으로 변화하는데 바로 이것이 지식의 상업화입니다. 실제로 현실 교육에서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은 ‘진리인가?’가 아니라 ‘어디에 쓸모가 있나?’라는 물음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리오타르는 새로운 규칙, 즉 새로운 게임을 만들어 낼 수 있도록 교육을 해야 하며 이는 상상력을 통해서 가능하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새로운 규칙의 제안은, 현대 지식의 최적 수행 원칙에 따라 필요 없는 것으로 낙인찍히고 버려지기 때문에 과학을 통해서는 인류가 진보적 해방을 이룩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위에서 설명한 부분들이 확장하여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이론이 제기 되었는데, 이는 아방가르드의 사조를 따라 니체의 해체 철학과 비트겐슈타인의 언어게임 이론을 거쳐 1970년대 리오타르의 「포스트모던의 조건」을 통해 포스트모더니즘의 이론이 확립되었습니다. 이제 포스트모더니즘 사상의 세 가지 특성에 대해서 설명하고자 합니다. 포스트모더니즘 사상에는 세 가지 특성이 있다고 사럽은 말합니다. 첫 번째로 모든 진리주장을 수사, 서사전략 혹은 푸코적 담론으로 축소시키려는 경향이 있고, 두 번째로 비트겐슈타인의 언어게임 개념에 호소하며 이는 서로 이질적 언어게임들에 대한 해석 중 하나를 결정할 수 없다는 것을 함축하며, 그리고 마지막으로 칸트적 숭고로의 전환입니다. 그 중에서 두 번째 특성의 경우 리오타르는 언어게임을 사회를 한데 묶는 사회적 결속으로 보았으며, 다양성과 갈등이 특징인 고통스러운 환경에서 사람들이 여러 가지 언어게임에서 발버둥치고 있는 모습이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상황에서 리오타르는 분쟁의 각 당사자가 자신의 진리주장을 보류할 정도로 다른 이의 관점의 차이를 존중해야 한다는 상대주의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실의 문제는 윤리적 판단의 문제와 아무런 상관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즉, 처음에 설명했던 하나가 아닌 여러 가지 언어게임 안에서 우리는 살아가고 있고 거기에는 각각의 묵시적인 규칙이 생기기 때문에 어떤 것이 옳다고 말할 수 없다는 주장입니다. 세 번째 특성은 칸트의 숭고 개념을 끌어왔는데, 칸트가 말하는 숭고란 우리의 표현력을 벗어나며, 이해할 수 있는 적절한 감각이나 개념을 찾을 수도 없는 경험을 표현하는 수단을 의미합니다. 여기에서 리오타르는 숭고란 진리와 가치에 대한 담론들 속에 깃들어 있는 완전한 이질성의 지표이기 때문에, 어떤 것도 그 본질을 이야기할 수 없고 각 사물들 사이의 이질성이 기본이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인지적 회의주의의 관점일 뿐이며, 실제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적합하게 설명할 수 없는 약점을 지니고 있다고 합니다. 지금까지 설명한 리오타르의 사상에 대해 사럽은 다섯 가지로 비판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로 리오타르가 하버마스의 ‘총체성’에 반박하고 헤겔-마르크스의 총체성 개념을 강조하면서, 하버마스의 ‘합의 공동체’라는 개념을 거부했습니다. 하지만 많은 종류의 대서사가 있는데도 리오타르는 그것들을 전부 하나로 묶어버린 후 비판을 가한다는 점에서 모든 대서사들을 거부할 필요는 없다고 사럽은 주장합니다. 두 번째로 리오타르는 총체 화하는 사회이론, 즉 거대서사를 거부하는데 이율배반적으로 「포스트모던의 조건」자체가 거대서사에서 이론의 시작을 도출하고 있기 때문에 그가 주장하는 포스트모더니즘 이론의 성립은 불가능하다고 사럽은 주장합니다. 세 번째로 리오타르의 작업에서 권력의 문제는 보류되어 있어서, 어떤 사회적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 또한 왜 그래야 하는지에 대해 아무 이론적 근거를 제시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고 사럽은 주장합니다. 마지막으로 사럽은 페미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을 비교했습니다. 페미니스트인 모리스는 고도로 발전한 지적․정치적 노력의 영역에서 여성의 작업이 반복해서 배제되고 있음을 지적했고 따라서 페미니즘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포스트모더니즘에서 이론적 배경을 끌어와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 두 사상은 철학이나 철학보다 넓은 문화의 관계에 심층적이고 광범위한 비판을 제공하며, 전통적인 철학의 토대에 의존하지 않고 사회비평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발전한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이 있지만, 포스트모더니즘이 정초주의와 본질주의에 대한 비판하지만 사회비판에 대한 개념화는 소홀히 하고 페미니즘은 사회비평에 대해 견고한 개념들을 제공하지만 정초주의와 본질주의에 빠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따라서 사럽은 여러 페미니스트들의 의견과 자신의 생각을 내세우며 각각은 상대편의 결핍을 보완해 줄 수 있는 관계라고 결론을 내립니다. |